【역사 속 그 사건】
잊혀진 전쟁,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전쟁 6.25
1945년 8월 10일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고 8월 15일 한국은 해방되었다. 이때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지역은 소련군,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한 것을 계기로, 남북에 각각 미·소 군정에 의한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광복 이후 자주독립 통일국가를 향한 염원은 남한에 대한민국,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좌절되었고, 분단은 고착 상태에 돌입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상 지역에 북한군의 기습적 남침이 시작되며 전쟁이 발발하였다. 오전 11시 북한정권은 남침을 은폐하기 위해 평양방송을 통해 ‘이승만정권의 남조선 군대에 의한 북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소련·중국·북한이 사전 모의를 통해 전쟁을 준비했다는 자료가 발표되며, 북침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중국과 소련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6월 28일,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 북한군 침략 격퇴를 위해 ‘6·26결의안’을 통과시키며 UN군 참전을 결정하였다. 한·미 연합작전 수행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7월 18일부터 UN군 사령관에 위임되었다. 9월 15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으며 2주일 뒤인 9월 28일, 북한군에 피탈된 지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다. 수도 탈환 이후 38선 이남의 북한군은 모두 격멸되었으나, 국토통일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0월 1일 국군의 선두부대가 38선을 돌파하였다. 또한 10월 7일 UN총회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며, 10월 9일부터 국군과 UN군의 전면적인 북진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북한 점령을 경계한 마오쩌둥(모택동)은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여 북한에 중공군을 참전시켰다.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세에 밀려 38선 남쪽으로 후퇴한 UN군은 1951년 1월 4일까지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를 철수시켰다(1·4후퇴). UN군의 철수 직후 서울은 중공군에 점령당하였다. 당시 미국은 UN군의 철군계획과 제주도 임시정부 이전계획까지 은밀히 수립하고 있었으나 한국 정부에는 이를 알리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국군과 UN군이 전선에서 위기에 처하자, 국민의 전쟁참여 결의를 다지고 무장한 100만 청년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과 UN군은 서로의 전력 손실과 장기전 우려로 인해 휴전회담을 계획하였다. 이는 동서 간 냉전체제 속에 권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논리에 기인한 것이었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에 처음 열린 이후로도 UN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반복되며 약 2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반공통일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한국군 대표 없이 UN군 대표 클라크,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하였다. 그로 인해 3년 1개월 2일, 총 1129일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휴전되었다. 또한 정전협정에 따라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가 한반도의 정전체제 이행 여부를 감시하게 되었다. UN군과 공산군은 종전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한국전쟁은 일시 중단된 상태로 남았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종결하는 의미의 평화조약, 강화조약의 성질이 아니라 단순히 전투행위를 중지시키는 협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편 휴전회담 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휴전협상에 대한 반대의사를 국제사회에 강력히 표명하였다. 그 결과 1953년 10월 1일 전후 한국사회의 안전보장을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이 허용되었다. 이로써 한미 연합방위체제, 한미주둔군지위협정 및 각종 안보·군사협정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6·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한국군과 유엔군은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 『시사상식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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