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탱자나무 연가 _ 우보 만보(漫步)
하 종 혁

‘태종대’, 고등학생 때부터 자주 어울리던 친구 셋이 나이 쉰이 넘어 만든 모임이다. 제각기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는데, 애초에 여행을 염두에 두고 만든 모임이라 부를수록 안성맞춤이다. 셋 모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중년의 평안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던 터였다. 수삼 년에 걸쳐 부부가 함께 해외에까지 뻔질나게 다니다 보니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거기다 노후에는 전원에 살겠노라고 노래하던 친구가 예정보다 일찍 시골에 자리를 잡게 되어 내 삶에도 덩달아 윤기가 흘렀다. 달랑 세 집이다 보니 이제는 한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다음 모임 날짜부터 정한다. 친구의 집은 백여 년 묵은 소나무가 빼곡하게 둘러싼 언덕배기에 앉아 있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틔었다. 그런데 이태 전 느닷없이 집 앞쪽에 태양광 패널이 자리를 잡더니, 얼마 되지 않아 왼편으로 더 큰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며 친구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집과 태양광 시설 사이에 제법 널찍한 완충구역을 두기로 했다는 게다. 안동 사는 친구가 그 말을 넙죽 받았다. 이참에 아예 집 주위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치면 어떠냐고. 탱자나무의 향을 맡는 시늉을 해가며 어릴 적 친구들과 탱자를 늘여놓고 밟아 터뜨리며 놀던 광경을 부품한 말에다 버무렸다. 나는 왼고개를 저었다.
“굳이 위리안치당한 죄인처럼 하필 탱자나무 울타리를 칠 건 뭐람.”
집주인이 나섰다. 그는 숨을 깊숙이 들이쉬더니 이내 오십 년 전의 소년으로 돌아갔다. 그의 어머니는 대구 달성공원의 서편 성벽 아래쪽 시장에서 난전을 펴고 있었다. 당신이 취급하던 품목이야 대중없었겠지만 친구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것은 다슬기였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칠성시장으로 ‘골배이’를 사러 가셨다. 어머니가 분주하게 다슬기를 삶아 씻을 동안, 탱자나무에서 가시를 따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탱자나무 가시는 몸통으로 갈수록 굵고 튼실해서 삶은 골뱅이를 빼먹기에 그만이다. 하지만 탱자나무 둥치에서 굵은 가시를 꺾는 일이 여남은 살 된 소년에게 만만했을 리 없다. 그는 덤덤한 듯이 말했다.
“나는 지금도 사용한 이쑤시개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아….”

나는 그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었을 것이다. 그의 말이 그렇게 심하게 떨린 적이 없었거든.
나는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내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내가 5학년 아니 6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어. 학교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했거든. 아마 탱자나무에 꽃이 한창이던 오뉴월쯤일 거라. 공놀이에 빠져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떨어지기 일쑤였지. 집으로 오는 넓은 신작로가 있었는데 한참 돌아가야 하는 탓에 지름길을 찾았어. 그 길은 산 중턱으로 나 있었고, 양쪽으로 탱자나무가 빽빽하게 있었지. 셋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널찍했는데도 달빛이 어두운 날이면 탱자나무 가시에 양쪽 어깨를 찔려가며 오는 거라. 무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또 서럽기도 하고…. 훌쩍이며 앞으론 절대로 이 길로는 안 갈 거라 다짐하곤 했지. 그런데 웃기는 건 말이야. 그 결심은 사흘이 채 못 가 또 그 길로 가는 거라.”
친구들은 일부러 박장대소를 했고, 곁에 앉은 부인네들은 연신 눈을 끔벅였다. 안동 친구의 아내가 떨리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학회에 참석할 목적으로 십 년 넘도록 그리스를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오가고 있었다.
“우리, 아테네에 함께 가요. 거기에는 오렌지 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더군요. 그 열매가 상품 가치는 그다지 없다지만 그 향을 잊을 수가 없네요. 온 도시가 온통 그 향으로 가득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게 우리네 탱자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네. 우리 건배해요.”
우리는 술잔을 높이 들어 힘차게 부딪쳤다.
“탱자를 위하여, 오렌지를 위하여!”
#하종혁 #탱자나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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