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포토에세이] 사람의 향기, 다반향초(茶半香初)

더피플매거진 2026. 1. 7.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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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사람의 향기, 다반향초(茶半香初)
노융성

노융성 기자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말이 있다. 차를 절반이나 마셨음에도 그 향기는 처음과 같이 여전하다는 뜻이다. 찻잔을 비워가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은은한 향을 내뿜는 차처럼, 사람의 인연 또한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성어다.

우리는 종종 인간관계를 이 차의 향기에 빗대곤 한다. 알게 된 지 오래되었어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한 마음과 태도가 변치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인격의 그윽한 향기를 느낀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는 관계가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한결같음'의 미학이다.

세태를 둘러보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흔히 본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모임을 가질 때, 사람들은 으레 "이것이 30년 된 귀한 술이다", "이것이 30년 묵은 보이차다"라며 그 물건의 가치를 자랑하곤 한다. 물론 귀한 것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겠으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술이나 차는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공산품에 불과하다.

정작 그 자리에서 가장 귀한 것은 30년 묵은 차가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나의 맞은편에 앉아준 그 '사람'이다. 따뜻한 눈빛을 나누고 즐겁고 유익한 대화로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그 사람이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짜 보물인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마셨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마셨는가'이다.

‘다반향초(茶半香初)’는 차를 마실 때 입안에 고이는 맑고 달콤한 ‘감로’의 향을 의미한다. 차와 명상이 하나가 되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수류화개) 우리 몸에도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환희를 느낄 수 있다. @노융성 기자


추사 김정희 선생이 벗인 초의선사에게 보낸 서찰에도 이 마음이 담겨 있다. 원래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시구인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에서 유래한 이 말은, 추사가 연경에서 옹방강과 교유하며 금석학의 정수를 익힐 때 접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귀국 후 벗에게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구의 진정한 의미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와 선이 하나라는 경지를 이해할 때 비로소 가슴에 와닿는다. "고요히 앉아 차를 마시니 향은 여전하고, 묘한 시간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여기서 '다반(茶半)'은 단순히 차가 반 남았다는 물리적 상태를 넘어, 차를 마시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코로 향을 맡고, 반쯤 마시고, 목으로 넘기며 그 맛을 음미할 때 입안에 감로(甘露)가 고인다. 불가에서 참선할 때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면 임맥과 독맥이 연결되며 맑은 침이 고이는데, 이것이 바로 감로다. 이 달콤하고 맑은 향이 혀끝에 맴도는 순간, 우리 몸의 막혔던 기혈이 열리고 생명력이 환희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이 바로 '수류화개(水流花開)'의 경지다. 단순히 계곡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풍경 묘사가 아니다.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이 맑아져 내면의 생명수가 흐르고, 기운이 통하여 생명의 꽃이 만개하는 벅찬 순간을 은유한 것이다.

차 한 잔에도 이러한 우주의 섭리와 몸의 이치가 담겨 있다.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정(情)은 어떠하겠는가.

좋은 차는 마실수록 입안에 감로가 돌고 몸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좋은 사람은 만날수록 마음에 향기가 남고 삶의 생기를 북돋아 준다. 오늘, 당신의 찻잔 맞은편에는 누가 앉아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다반향초'처럼 한결같은 향기를 지닌 사람인가?

30년 묵은 차보다 더 깊고 진한, 변치 않는 사람의 향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금정산 예죽실에서 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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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peoplemagazine.co.kr/detail.php?number=18556&thread=22r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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