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광복절 특집] 붉은 벽돌에 새겨진 피눈물, 대구 삼덕교회 2층으로의 순례

더피플매거진 2025. 8. 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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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저항의 심장, 도심 한복판에서 다시 뛰다
이육사의 '264'부터 이름 없는 영웅까지…차가운 감옥을 채운 불꽃들
단순한 관람을 넘어, 아픈 역사와 마주하는 교감의 공간

대구형무소 역사관. @중구청


[대구=더피플매거진] 광복 80주년. 분주한 대구 도심, 평온한 교회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기면 시간의 문이 열리고 일제강점기 가장 참혹했던 저항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이번 광복절, 반드시 찾아야 할 순례지가 있다면 바로 이곳, ‘대구형무소 역사관’이다.

1908년 경상감영 옥사를 빼앗아 문을 연 대구감옥. 1910년 삼덕동으로 이전하고 ‘대구형무소’로 이름을 바꾼 이곳은 일본식 목조건물과 삼엄한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감옥이자 가장 악명 높은 탄압의 상징이었다.

역사가 남긴 숫자는 이곳이 단순한 수용시설이 아닌 ‘생지옥’이었음을 증명한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는 공식 기록으로만 206명. 당대 최대 규모였던 서대문형무소(195명)보다 많다. 수감자 수는 서대문의 절반 수준이었지만 사망자는 더 많았다는 사실은 이곳의 환경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당시 대구에 삼남(충청·호남·영남)을 관할하던 복심법원(고등법원)이 있었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일제가 사법권을 장악한 1909년을 기점으로 수감자는 폭증했다. 하루 평균 2.5명이던 재감 인원은 순식간에 600명대로 치솟았고, 3·1운동 직후에는 1,700명을 넘어섰다. 

당시 수감됐던 장석영 선생은 “밤에는 제대로 누울 수도 없어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흑산일록’에 기록했다. 322평 남짓한 감방에 수천 명이 갇힌 현실, ‘비행기 고문’, ‘잠수함 고문’ 등 반인권적 만행은 수많은 선열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구형무소. @조선형무소사진첩


차가운 감옥을 채운 불굴의 불꽃들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민족 저항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이곳에 수감됐다. 그의 필명 ‘이육사’는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으로, 처음에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戮史)’는 서슬 퍼런 항일 정신을 담았다. 비록 일제의 감시 속에 ‘육지 육(陸)’자로 바꿔 써야 했지만, 그의 저항 정신은 시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육사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를 주도한 장진홍 의사, 3·1운동 당시 대구 만세시위를 이끈 윤현진 선생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고문과 억압을 견디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역사관 벽면을 가득 채운 2,300여 명의 이름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불꽃들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대구형무소 감방. @조선형무소사진첩


아픈 역사와 마주하는 교감의 공간
세월이 흘러 잊힐 뻔했던 이 아픈 역사는 지난 2월, 대구삼덕교회 2층에 ‘대구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면서 비로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 독립운동가의 치열했던 삶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들려오고, 당시의 실제 붉은 벽돌과 사형판결문은 책 속의 역사를 눈앞의 현실로 마주하게 하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역사가 관람객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교감의 공간인 셈이다.

대구형형무소와 공장 위치. @1937년 조선총독부


광복절 아침, 우리는 어디에서 역사를 기억해야 할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이들의 절규와 함성이 잠든 곳. 그들의 피눈물이 서린 대구형무소 역사관에 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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