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칼럼] 계영배 _ 우보 만보(漫步)

더피플매거진 2026. 2. 23.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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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 _ 우보 만보(漫步)  
하 종 혁

수필가 _ 하종혁


 ‘술에 장사 없다’는 아내의 말에 토도 달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도 나는 여태 술을 멀리하지 못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피하고 거북한 사람과는 동석하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 마음을 다잡긴 해도, 막상 자리가 길어지면 그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사생결단으로 치달리기가 십상이다. 과유불급이라 했거늘 하물며 술에 관해서랴. 

조선시대에도 술의 폐해가 어지간했던지 시도 때도 없이 금주령이 내려졌다. 개국 직후부터 실시된 금주령은 그 횟수를 셀 수조차 없을 정도인데, 그럼에도 위세 높은 사대부나 관료들은 이를 어기기 일쑤였단다. 더욱이 음주나 양조가 예외적으로 허용되거나 묵인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이야기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세종은 항상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윤회尹淮(1380∼1436)더러 술을 하루에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윤회는 개의치 않고 아예 지름이 한자나 되는 양푼을 갖고 다니면서 마셔대니 임금인들 어쩌겠나. 또 하나, 연전에 방영된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이다. 정철鄭澈(1536∼1593)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지라 선조는 이를 경계하여 손수 자그마한 은잔을 내렸다. 송강이 그 잔을 한껏 두드려 펴서 진탕 퍼마시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게다.

전통 주법에 세 가지의 계명이 있었다. 술을 조심해 마시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첫째는 유시계酉時誡로 오후 6시에서 8시 정도까지만 마시라, 둘째는 현주계玄酒誡로 술 마시고는 물을 마셔 입안과 식도를 씻어 내라, 셋째는 한자리에서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삼배계三杯誡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점잖은 훈계가 예나 지금이나 ‘술꾼’들에게 얼마나 소용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나는 삼 남매를 두었는데, 녀석들이 어릴 때부터 아비의 흐트러진 모습을 심심찮게 본지라 술이라면 모두 넌더리를 냈다. 특히 막내아들 녀석이 나를 빤히 보면서 자신은 커서도 결단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노라고 큰소리칠 때면 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술을 마다키는커녕 어쩌다가 내 소매를 슬쩍 끄는 게 아닌가. 아내의 원망 소리가 하늘을 찌른 거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부자간의 자리가 거듭되자 이제 아내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돌아앉고 만다.

이미지. @더피플매거진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있다.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인데, 술이 일정한 양을 넘으면 넘치도록 만들어 절주배節酒盃라고도 불린다. 고대 중국의 ‘의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공자도 말년에 당신의 곁에다 두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실학자 하백원河百源(1781∼1845)이라는 사람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거나, ‘우명옥’이라는 도공이 만년에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의하면, 계영배는 훗날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1779∼1855)에게 전해졌다. 그는 이 잔에 새겨진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라는 글귀를 두고 보면서 스스로 과욕을 경계하여 조선 역사상 위대한 거상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이제는 술자리를 함께할 친구도 흔치 않게 되었다. 요즘 나의 가장 가까운 술친구는 바로 아래 동생이다. 외환위기 때 하던 사업이 잘못되어 고생하던 그는 건설 현장의 일용직으로 전직해서 오랫동안 고군분투했다. 이태 전에 심장혈관에 탈이 나서 시술을 받은 동생은 두어 달에 서너 번 나와 함께하는 자리가 그렇게 기다려진단다. 즐기던 술조차 멀리해야 하는 따분한 일상이라 맥주 한 잔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고 너스레를 떤다. 사정이 이럴진대 나도 한 병으로 그쳐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진다. 

근래에는 은행에서 퇴직한 셋째 동생까지 같이 어울리니 늘그막의 크나큰 낙이다. 소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큰형을 보는 게 불편했던지 동생은 한 병 더 부르라고 재우친다. 그가 평소에 하던 말을 떠올렸다. 

  ‘형님, 우리 조금씩 오래오래 마셔요’ 

나는 잔을 맞대고 소설에서 본 계영배의 글귀를 나직이 읊조렸다.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더불어 죽기를 원한다.’ 

동생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계영배 #하종혁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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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 _ 우보 만보(漫步) 하 종 혁 ‘술에 장사 없다’는 아내의 말에 토도 달지 못하는 지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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