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의 역사와 선유문화(船遊文化)의 기원(起源)
다사의 역사를 기록한 고문헌은 다수가 전해진다. 그중에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河濱縣 本多斯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에 우리지역의 지명을 '다사지현(多斯只縣)' 에서 '하빈현(河濱縣)'으로 고쳤다는 내용이다.
'다사(多斯)'라는 지명은 신라어(新羅語)로 물(水, 河)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사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강(合江)하는 지역으로 대부분의 마을(里)이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면서 하빈현은 하동면(河東面)·하남면(河南面)·하서면(河西面)·하북면(河北面)으로 세분화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하서면과 하북면이 통합되어 하빈면이 되고, 하동면과 하남면이 통합되어 다사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된다.
다사 선유문화(船遊文化)의 기원(起源)은 이천리(伊川里) 선사(仙楂)에서 찾을 수가 있다. ‘선사’는 ‘신선(神仙)이 뗏목을 타고 놀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여기서 신선은 유선(儒仙)으로 불리어졌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선생을 말한다.
고운 선생이 다사 선사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仙槎庵 在馬川山庵傍 有崔致遠洗硯池(선사암은 마천산에 있으며, 곁에는 고운선생이 벼루를 씻던 세연지가 있다.)” 전한다. 그 외에 『여지도서(輿地圖書)』·『대구읍지(大丘邑志)』 등의 지리서와 『초간집(草澗集)』·『낙재집(樂齋集)』·『양직집(養直集)』 등의 문집에서 고운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선유문화의 전통은 조선시대에 크게 발전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1420~1488)의 「대구십경(大丘十景」이 실려 있다. 그 제1경 금호범주(琴湖泛舟)를 옮겨본다.
琴湖淸淺泛蘭舟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목란 배를 띄우고
取次閑行近白鷗 차츰차츰 한가로이 백구 곁으로 다가가네.
盡醉月明回棹去 달 밝은 밤 한껏 취해 노 저어 되돌아가니
風流不必五湖遊 반드시 오호에 노닌 것만 풍류가 아니로다.
선유문화를 더욱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한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槎船遊圖)가 전해진다. 선유도는 대구경북 지역 선비 23인이 1601년 선사에서 부강정(浮江亭)까지 뱃놀이를 한 사실을 기록한 그림이다. 선유도는 다사지역을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당시에 참석한 선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감호 여대로(鑑湖 呂大老)·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죽오 곽대덕(竹塢 郭大德)·낙포 이종문(洛浦 李宗文)·수암 정사진(守庵 鄭四進)·양직 도성유(養直 都聖俞) 등이다.
다사의 선유문화는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9년 8월 16일에 개최된 ‘다사선유문화축제’는 전통적인 선유문화를 계승하고 차별화된 축제문화로 발전시키는 것이 축제의 취지라 할 것이다. 축제의 장소는 관란대(觀瀾臺) 아래인 강창교(江倉橋) 둔치와 문산리 영벽정(暎碧亭)도 선유문화의 의미 있는 장소라 하겠다.
다사황토사연구회 회장 최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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