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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9

(시인의 산문) 안나의 길(2)

(시인의 산문) 안나의 길(2) 이병훈 온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다. 네팔 히말라야 계곡 어둠이 시야 가장자리로 잦아들 때쯤 지친 몸으로 울레리 산장에 발을 들였다. 산장이라 하지만 전기도 우물도 없는 초라한 곳이었다. 촛불 속에 소박한 식사가 나왔다. 산장주인인 젊은 부부는 어린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살림이 별반 넉넉하지 않아도 행복해 보였다. 그들 부부는 비가 오는 밤중인데도 밭에 나가 과일을 따오고 따끈한 차도 끓여주었다. 이방인의 낯설음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도 따스했다. 내일은 고레파니를 거쳐 푼힐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고산증세가 올 수도 있으니 미리 수분을 많이 섭취해 두어야 했다. 깊어 가는 습한 밤이 추위를 부추기자 까닭 없는 서글픔이 피곤에 젖은 침낭 속을 헤집고 들..

문학 2020.12.18

<수필> 사랑의 열정은 영혼의 병인가

사랑의 열정은 영혼의 병인가 ‘미친 사랑의 노래’, ‘미친 사랑’, ‘사랑에 미치다’, ‘지독한 사랑’, ‘중독 된 사랑’. 사랑에 대한 열정에 흔히들 ‘미치다’는 말을 많이 쓴다. 또 다르게 ‘불타고 있다’, ‘눈이 멀었다’, ‘제 정신이 아니다’는 말도 쓴다. 이런 극단적인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열정은 그것에 사로잡힌 자들로 하여금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마치 현실이 영원한 듯, 시간을 벗어난 듯이 행동하고 자신의 상황은 ‘특이한 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킴으로써 현실적인 감각과 판단을 유보하는 관용을 갖는다. 어찌 보면 열정이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고 자기행위의 합리화를 부추긴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랑의 열정을 ‘영혼의 병’이라고 했던가. 혹은 ‘이성적 능력..

문학 2020.11.27

난전(亂廛) 이병훈

난전(亂廛) 이병훈 연꽃 만발한 연지에서 난전을 편 노구의 주인은 오지 않는 발길을 기다린다. 그 사이, 꺼져가는 어깨 위로 고운 노을이 내린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저마다의 난전에서 오지 않는 발길을 기다리는 일이다. 하염없이, 고운 노을이 내릴 때까지. * 약력: 이병훈(李炳勳) - 본명: 止軒 - 李炳淳(이병순) 등단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낭송문학회 회장 달성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문화진흥위원 사)세계문인협회 시분과 정회원

문학 2020.10.13

산山이 선생先生이다

산山이 선생先生이다 혼자 무엇이든 큰 결정을 앞두거나, 가야 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지리산을 찾는다. 그 품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은 특별한 힘을 준다. 등반의 힘든 과정을 인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 축적은 큰 자산이 된다. 극한의 과정을 미리 체험해 봄으로써 학습되는 효과도 있다. 정상을 도전함으로써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거칠어진 심성을 가라앉혀 마음의 수평을 잡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 천왕봉은 해발 1,915m로 힘든 코스다. 천왕봉을 빨리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산청마을과 백무동 두 군데가 있지만 나는 백무동 코스를 즐겨 탄다. 백무동은 일설에 백 명의 이름난 무당이 이..

문학 2020.10.02

나비부인의 허밍코러스

나비부인의 허밍코러스 -이 병훈-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7만여 명의 고귀한 생명들이 한순간 회오리바람처럼 역사의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고,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원폭전시관엔 그때의 참혹함을 말해 주듯 피폭자의 두개골이 철모에 엉켜있고, 여러 개의 공병이 사람 뼈와 함께 녹아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원폭의 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전쟁으로 실현해 보려는 위정자의 흔적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전시되어 있고, 나는 호기심으로 그 장면을 재생해 보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렇듯 인간의 오만과 무력함이 전시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우리는 그 무엇에 인간의 강함을 확인시킬 수 있는지. 잊혀져가는 역사의 끝자락을 움켜잡고 마음속으로 ..

문학 2020.07.31

생선 가시 / 이병훈(止軒)

생선 가시 / 이병훈(止軒) 식탁에 올려진 조기 살을 먹기위해 가시를 뽑는다. 물속 조기의 아름다운 유영을 받쳐주었던 가시 누군가의 절대 지킴이가 누군가의 성가심이 되는 이 배은망덕한 구조 나란 삶도 조용히 사라질 때 세상의 지킴이가 된 그런 날이 있었다.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몸짓으로 * 약력: 이병훈(李炳勳) - 본명: 止軒 - 李炳淳(이병순) 등단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낭송문학회 회장 달성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문화진흥위원 사)세계문인협회 시분과 정회원

문학 2020.07.20

<수필> 장모님과 새 이병훈

장모님과 새 이병훈 장모님은 시골에 홀로 살고 계십니다. 우연히 잉꼬 한 쌍을 얻어 기르게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새들의 소리에 반갑게 눈을 뜨고, 긴 봄날 마루에서 혼자 점심을 들 때도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입맛을 돋우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장모님의 외로운 일상의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은 기쁨으로 커갔습니다. 초여름의 감잎들이 허름한 농가에 그늘을 드리울 즈음, 잉꼬는 새끼 두 마리를 부화하여 오붓한 일가를 이뤄 집안 가득 온기를 채워 주었습니다. 장모님은 신바람이 나서, 새장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 길어졌습니다. 어느 날 새장이 좁은 때문인지 네 식구의 잦은 뒤척임으로, 빗장이 열려 그만 어미 새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당황한 아비 새는 새장 안을 이리 저리 푸드덕거렸고, 한창 먹이를 받아먹던 새끼들은..

문학 2020.07.06

3번 버스는 강정 갔다

3번 버스는 강정 갔다 이 병 훈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강정에 갔다. 포장이 되지 않은 날것의 길위에서 낡은 버스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참았던 눈물은 리듬에 못이겨 조금씩 흘러내렸다. 참 가난했었다. 자식이 많은 아버지의 한숨은 친구의 어두운 방보다 더 깊었고 얹혀사는 빈주머니에 부끄러움의 이끼가 자랄수록 3번 버스는 강정으로 데려갔다. 오! 어서 오라! 장마를 맞은 낙동강의 도도한 물살이 긁어내고픈 상처의 바닥을 말끔이 씻어간 듯한 희열에 저물어가는 기슭에서 여윈 몸을 떨었다. 대실에 아직 사람이 붐비지 않던 날 3번 버스는 강정에 갔다. 외롭고 긴 뜨거웠던 결핍을 싣고 강창보다 깊숙한 강정으로. 약 력 이병훈(李炳勳) - 본명: 止軒 - 李炳淳 한국문인협회 문화진흥위원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문학정신..

문학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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