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이 선생先生이다
혼자 무엇이든 큰 결정을 앞두거나, 가야 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지리산을 찾는다. 그 품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은 특별한 힘을 준다.
등반의 힘든 과정을 인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 축적은 큰 자산이 된다. 극한의 과정을 미리 체험해 봄으로써 학습되는 효과도 있다. 정상을 도전함으로써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거칠어진 심성을 가라앉혀 마음의 수평을 잡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 천왕봉은 해발 1,915m로 힘든 코스다. 천왕봉을 빨리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산청마을과 백무동 두 군데가 있지만 나는 백무동 코스를 즐겨 탄다. 백무동은 일설에 백 명의 이름난 무당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백무동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하동바위를 거쳐 장터목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야 장터목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다.
마음의 갈피를 여닫으며 걸어가는 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의 무심함이 나의 몸에도 전달되어 한결 자유롭고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끝에 흐르는 땀방울은 몸에 쌓인 노페물과 함께 흘러 상쾌한 기분마저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희열을 느끼게 한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산물이 모여 솟는 작은 샘을 만난다.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샘물을 물통에 채우며 새로운 각오로 다시 산길을 오른다. 자신과의 다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앞이 탁 트인 바위에 앉을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보약이라도 먹은 듯이 새로운 에너지와 맑은 정신을 샘솟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다. 너럭바위에 앉아 내가 결정해야 할 일, 그 길이 과연 정의로운 길인가, 하이데거도 만나고 맹자·공자도 만나고, 소크라테스·톨스토이도….
명상하며 답을 찾아본다.
백두대간의 장엄한 전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바세계가 다 발 아래라 뜻하지 않은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경지에 빠져보기도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단정 지었던 일들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마음에 꽁하니 담아놓은 것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산은 세상사에 지치고 힘든 나를 안아주고 달래주는 큰 어른이다. 종지 보다 작은 삶의 그릇에 빠져 바둥대는 내 모습을 멀리서 높이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투명한 유리세계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산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산장은 예약을 해야 한다. 사람이 많을 때는 예약 하지 못한 사람은 저녁까지 기다려서 예약손님이 나타나지 않은 남은 공간에 그마저도 나이순으로 배정받는다. 이래저래 절차를 치르고 산장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쉽게 마음을 나눈다. ‘산의 품’이라는 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서로의 주관을 이해해주고, 서로의 객관을 마주하며 상대와 상황을 마주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정상을 향해 등반을 시작하니 고지대의 세찬 바람이 건너 산으로 날려 보낼 듯이 기세가 등등하여 온몸이 으스스 떨려 왔다. 드디어 정상이다. 천왕봉 세 글자가 떡하니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된 등반의 피로감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삼대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힘들게 온 몸을 불태우고 천왕봉 정상에서 비는 소원은 꼭 들어줄 것만 같기도 하다. 하늘에는 붉은 선들이 점점 타오르더니, 그 사이로 둥그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장엄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또 한번 산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고사목이 있는 주목 군락지의 풍경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평생 지키며 서 있기만 해도 인간에게 크나 큰 위안과 교훈을 준다. 세상사에 찌든 몸과 마음을 다 받아주고 새 몸, 새 마음으로 돌려보내는 은혜를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베풀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가치관으로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가. 조금씩 비우고 내려놓고, 부족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자연의 위대한 품에서 작고 나약한 인간임을 새삼 깨닫는 시간.
지리산에서의 1박2일.
화두(話頭)를 풀어 낸 수도승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 같은 산에서 하나를, 그리고 또 하나를, 둘을 해결하고 내려온다.”
-마흔 살 어느 날의 산행에서 신경용
신경용
-금화복지재단 이사장
-커넬대 대구캠퍼스 이사장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사랑의 열정은 영혼의 병인가 (0) | 2020.11.27 |
---|---|
난전(亂廛) 이병훈 (0) | 2020.10.13 |
나비부인의 허밍코러스 (0) | 2020.07.31 |
생선 가시 / 이병훈(止軒) (0) | 2020.07.20 |
<수필> 장모님과 새 이병훈 (0) | 2020.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