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시인의 산문) 안나의 길(2)

비슬신문 2020. 12. 18. 11:06
반응형

(시인의 산문)                안나의 길(2)

                                                                                                                     이병훈

 

온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다. 네팔 히말라야 계곡 어둠이 시야 가장자리로 잦아들 때쯤 지친 몸으로 울레리 산장에 발을 들였다. 산장이라 하지만 전기도 우물도 없는 초라한 곳이었다. 촛불 속에 소박한 식사가 나왔다. 산장주인인 젊은 부부는 어린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살림이 별반 넉넉하지 않아도 행복해 보였다. 그들 부부는 비가 오는 밤중인데도 밭에 나가 과일을 따오고 따끈한 차도 끓여주었다. 이방인의 낯설음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도 따스했다.

내일은 고레파니를 거쳐 푼힐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고산증세가 올 수도 있으니 미리 수분을 많이 섭취해 두어야 했다. 깊어 가는 습한 밤이 추위를 부추기자 까닭 없는 서글픔이 피곤에 젖은 침낭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너와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의 반복음은 망각의 바닥에 설 앉은 J의 잔상을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렸다. 그녀는 여기 안나에서 스물 몇 해의 고운 열정을 묻기까지 자신을 향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주변의 조용함이 아침을 깨웠다. 창문을 가득 메운 햇살에 혹시나 하며 바삐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까지만 해도 가스 때문에 보이지 않던 안나푸르나의 남봉이 짙푸른 하늘을 이고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나를 밀어낼 것만 같은 위용은 순간, 숨을 멎게 했으며 드디어 히말라야의 중심에 서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눈 아래 끝 간 데 없는 천상의 구름바다가 발을 허공에 담근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 위에 솟은 안나와 히운출리, 강가푸로나, 마차푸차레 등 만년설의 파노라마가 아침 햇살에 더욱더 순백을 자랑했다. 두 눈 속에만 담는 것이 너무도 아까워 카메라 셔터 위의 검지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몇 해 전 한여름 휴가를 맞아 설악산 종주산행을 할 때였다. 새벽부터 우리는 경사가 심한 공룡능선을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특히 여름철의 공룡능선은 참으로 지루한 코스였다. 그리고 유달리 물이 귀해 다음 막영지까지는 물을 아낄 수밖에 없었고, 흐르는 땀만큼 목이 타들었다. 계획대로 빡빡하게 움직이는 산행이었므로 다소의 긴장에 말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서로 목이 마르다는 의사는 눈으로만 읽을 뿐 표현을 삼갔는데, 마침 앞서가던 그녀가 바위틈새의 가는 물줄기를 발견하고 탄성을 울렸다. 모두 달려들어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순간 그녀는 선배 먼저!’를 외쳤다. 그리곤 재빨리 컵을 꺼내 물을 받아 저만치 있는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산악회 후배인 그녀가 산악 조직론을 거론하는 것이 일순 대견하기도 했으며 떡잎부터 안다는 산쟁이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 있어 흐뭇했다.

평소에도 그녀는 히말라야 14좌중 안나푸르나가 제일 좋다며 언젠가는 여성등반대를 꾸려 안나 원정등반을 이루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 후로 그녀는 내적 기량을 다듬는 것에서부터 정보와 자료수집 훈련 등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솔선수범 했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며 꼭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내심 빌어주었다. 그런데 나름의 의지가 굳은 산꾼들은 대개가 자신의 의지와 행동철학이 분명한 만큼 개성이 강해 솔로(단독)등반을 좋아한다. 그녀도 여러 가지 척박한 산악계 환경 속에서 순수여성대의 원정등반 실현에 노력을 기울이다 여의치 않자 결국은 혼자서 말도 없이 안나로 떠났던 것이다.

해질 무렵에야 고레파니를 거쳐 푼힐에 당도했다. 네팔의 3대 전망대 중 하나인 이곳에서는 14좌 중의 하나인 다울라기리와 투쿠체, 닐기리, 마차푸차레, 안나푸르나 등 빼어난 산들이 지구의 경계를 날카롭게 가늠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만년설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지친 하루의 일과가 끝나자 푼힐의 노을은 사위어 가는 한 인간의 절절한 꿈을 조용히 거두어 간다.

어둠이 피곤한 몸에 실려 부재(不在)의 아픔으로 번져왔다.

 

 

 

 

 

: 안나 : 산악인들끼리 부르는 안나푸르나(히말라야 산맥의 8m14 좌중 하나) 산의 애칭

가스 : 산악용어로 산안개를 일컬음

 

반응형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사랑의 열정은 영혼의 병인가  (0) 2020.11.27
난전(亂廛) 이병훈  (0) 2020.10.13
산山이 선생先生이다  (0) 2020.10.02
나비부인의 허밍코러스  (0) 2020.07.31
생선 가시 / 이병훈(止軒)  (0) 2020.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