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풍곽씨 십이정려각】
충효의 고장 달성!!
예절 바르게 살라는 솔례마을의 상징
노자의 도덕경 18장에
大道廢有仁義 (대도폐유인의), 慧智出有大僞 (혜지출유대위). 六親不和有孝慈 (육친불화유효자), 國家昏亂有忠臣 (국가혼란유충신)이란 말이 있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仁義)가 생겼고, 지혜가 생겨나니 큰 거짓이 생겼다. 육친이 화목하지 못하니 효도와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면 충신이라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거란, 여진, 홍건족, 청나라, 일본 등등. 도덕경에 국가가 혼란스럽고 어려울 때 충신이 난다는 말처럼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난 충신 중에 한 분이 현풍인(玄風人)인 곽준선생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은 효자로 알려져 있다.

현풍IC에서 내려 우회전하여 구지 국가산업단지로 가는 길목에 솔례마을이 있다. 어사 박문수는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으로 안동의 하회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현풍의 솔례라고 했다. ‘솔례’라는 이름은 세조때 청백리인 곽안방이 자손들이 예절 바르게 살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는 충효를 가업으로 삼고 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는 뜻의 ‘충효세업, 청백가성’이란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 맞은편에 단청으로 된 일자형 건물이 있는데 현풍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 十二旌閭閣)이다. 정려란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고 표창하기 위해 내린 것으로 정려각은 이를 모신 상징적인 건물이다. 내부에는 선조31년(1598)부터 영조 임금(1725) 때까지, 120여 년 동안 포상된 곽씨 집안 12인의 정려기(旌閭記)가 모셔져 있는데, 한 가문에서 표창을 받은 사람이 12명이나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은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국가로 삼강오륜을 중시했다. 삼강은 ‘충’을 의미하는 군위신강(君爲臣綱), ‘효’를 말하는 부위자강(父爲子綱), ‘열녀’를 말하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이며, 오륜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십이정려각의 정문은 삼강문(三綱門)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삼강이다.
건물의 오른쪽에 일문삼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곽준선생의 집안에서만 충신, 효자, 열녀가 나왔음을 말한다. 곽준선생이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을 지키던 중, 가등청정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 이상(履常)과 이후(履厚)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함께 전사하였다. 곽이상의 처 거창 신씨는 남편 따라 자결하고, 곽준의 사위 유문호가 전사하자 그의 아내도 아버지와 남편 따라 자결했다. 선조 임금이 이를 알고 이 가문에 5인의 정려를 내렸다. 곽준선생의 위패는 유가읍 예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시호는 충렬공이다.

임란 때, 현풍 고을에도 왜적들이 양민을 탄압하고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백성들을 강제동원하기에 피난가야 했다. 곽재우의 사촌 형인 곽재훈에게는 결, 청, 형, 호라는 4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병환중인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 피난생활을 했다. 부친의 천식이 심해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굴 밖을 지나던 왜병이 이를 알고 밖으로 나오라 했는데 네 아들이 차례로 나가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아버지를 지켰다.
이를 본 왜장은 이들의 지극한 효에 감동하여 부친을 석방하며 아버지의 등에 <此人 四孝子之父 後人勿害(차인 사효자지부 후인물해)이라고 쓴 패를 달아 보내니 다른 왜적들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던 바위굴에 ‘사효자굴’이라 새겨 후세에 전하고 선조임금은 이들 네 명의 효자에게 ‘효자사공(孝子四公)’의 정려를 내렸다.

양 효자는 곽의창과 곽유창 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곽주의 차남과 삼남이다. 곽의창 형제는 지극하게 부모를 섬겼는데 유창이 세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라 상복을 입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늦었지만 상복을 입고 예를 다하려고 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 전에는 메밀가루 한 홉만 물에 타셔 마셨고, 장례 후에는 나물밥 반 그릇에 소금국을 먹으면서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이들의 효성은 죽고 난 뒤 조정에 알려져 장원서 별검이란 벼슬이 증직되고 정려를 받았다.
곽내용(乃鎔)의 처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견디다가 병상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조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정려를 내렸다. 그 외에도 곽재기의 아내 광주이씨는 왜병으로부터 순결을 지키려고 물에 빠져 죽어 선조임금으로부터, 곽홍원의 아내 밀양박씨는 강도로부터 남편을 보호하고 대신 죽었기에 현종이,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죽자 먹지 않고 따라 죽어 현종이 정려를 내렸다.
정려가 내릴 때마다 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1725년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6·25전쟁 때 건물 일부와 비석 1기가 파괴되었는데 1963년에 이를 복원해 정면 12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안에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으며 매년 4월에 향사를 지낸다.
1995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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