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단종 복위운동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 하빈(河濱) 묘골에서 만나다

비슬신문 2023. 2. 2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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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복위운동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

하빈(河濱) 묘골에서 만나다

 

조선시대 왕위 계승의 일반적인 유형이 부자간의 계승이다. 차남, 삼남, 조손, 숙질, 형제가 없어 친척이 계승받는 방계도 있지만 찬탈의 경우도 있었다. 그 찬탈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다.

세조는 세종의 차남으로 수양대군이다. 문종이 즉위 2여년 만에 병사하자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나 이름뿐인 왕이고 실질적인 권리는 숙부인 수양대군이 장악했다.

계유정난(1453)은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사건으로 세조가 집권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단종은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나 금성대군의 난으로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운동을 한다. 허나 거사를 치루기 전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김질(金礩)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은 죽음에 이른다. 이때 죽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육신(死六臣)으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다. 이들은 3대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후손이 끊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취금헌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선생의 후손이 우리 지역인 하빈 묘골에서 그 대를 이어 살고 있을까.

육신사 입구 충절문

묘골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후손이 사는 서흥김씨 집성촌인 현풍의 못골과 경주최씨들이 사는 둔산동의 옻골마을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반촌(班村)이다. 못골은 큰 못이 있는 마을이어서못골이라 하고, 옻골은 옻나무가 많아서, 묘골은 마을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묘하게 생긴 지형(地形)이라 해서 묘골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 묘골은 순천 박 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앞서 말한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다. 바로 육신사(六臣祠).

한문을 확인하지 않고 한글로만 읽으면 동화사, 용연사와 같은 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곳은 여섯 충신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숭정사 내 사육신의 위패(왼쪽 첫 번째가 취금헌 선생의 위패)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로 여기에 가담한 여섯 충신들의 집안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부인, 며느리, 딸들은 관청이나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선생의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묘골은 원래 순천 박 씨의 세거지가 아니라 성주 이 씨 세거지였다. 멸문지화를 당해 노비가 된 선생의 며느리 중 둘째 며느리가 박순의 아내로 성주 이 씨였다. 그 당시, 그녀는 아이를 가졌었다. 세조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 친정집 계집종은 딸을 낳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하는 걸까. 그 둘을 바꿔치기 하여 대를 잇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육각비와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과 박준규 국회의원 기념 표지석

그 아들은 박 씨라는 성()을 가진 천한 노비라는 뜻의 박비로 살아간다. 그가 열일곱 살 때 이모부인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와 자수를 권한다. 그 당시 임금이었던 성종이 박비의 자수를 받아들이고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혈육이라는 뜻에서 일산(壹珊)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가 오늘의 묘골을 순천박씨의 집성촌으로 있게 한 박일산이다.

 

박일산은 자신이 자란 묘골에 99칸의 종택을 짓고 산다. 그의 손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삿날에 꿈을 꾸게 된다. 그의 꿈에 5분이 나타나 배고프다고 하여 고조부인 박 선생의 사당에 5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이 별묘를 세워 6명의 제사를 모시는 게 좋다고 하였는데 이 별묘가 육신사의 모태다.

육신사라는 이름은 1970년대 중반 유적정화사업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외삼문 밖에는 '육신사', 안에는 '절의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육신사 현판은 ()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외삼문, 홍살문을 지나면 1979년에 건립된 육각비(六角碑)를 만난다. 이 비에는 사육신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박정희, 최규하대통령과 박준규 국회의원의 기념표지석이 나란히 있다.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

성인문(成仁門)인 내삼문 안에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정사(崇正祀)가 있으며, 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선생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祀), 재실로 지은 숭절당(崇節堂), 순천박씨 99칸 종택에 딸린 부속정자로 지은 태고정(太古亭)이 있다. 태고정은 임란 때 사당을 제외한 다른 건물들과 소실되었지만 광해군(1614)때 박팽년의 6세손인 박종남에 의해 정면 4, 측면 2칸 건물로 동쪽 2칸은 마루, 서쪽 2칸은 방으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소실되기 전의 태고정을 구정(舊亭), 이후를 신정(新亭)이라고 했다. 박종남의 아들 박숭고(朴崇古)옛것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는 뜻을 담아 태고정(太古亭)이라고 하였고 1971, 보물로 지정되었다.

태고정 마루에는 오음(梧陰)윤두수(尹斗壽)(1533~1601)의 시가 있다. 박팽년선생의 동생인 박대연 부인이 오음선생의 증대고모(曾大姑母) , 증조할아버지의 누이다. 그의 시에서 연유한 일시루(一是樓)가 태고정과 함께 편액으로 걸려있으니 그의 시를 소개한다.

 

亂後人家百不存(난후인가백부존) 난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 남지 않았는데

數間祠宇倚山根(수간사우의산근) 두어 칸의 사당이 산기슭에 서 있네

神明自是蒼天佑(신명자시창천우) 신명도 감동하여 하늘도 도와주시니

虜火何能震廟魂(노화하능진묘혼) 오랑캐의 불이 어찌 사당의 혼을 두렵게 하리

태고정에 대해 설명하시는 박종혁 종친회 회장

이 시뿐만이 아니라 해장재 신석우의 차운시(次韻詩: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묘골로 온 명나라의 사신이 접반사 중의 한 분인 이호민에게 만남을 기념하는 시를 부탁했는데 그가 지은 오언율시 또한 태고정에서 만날 수 있다.

 

태고정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나는 한석봉 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태고정, 다른 하나는 안평대군이 쓴 일시루다. 이 둘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사육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확증하는 것은 편액 아랫부분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글씨 때문이다. 비해당은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을 담아 세종 임금이 안평대군에게 내린 당호다.

몽유도원도와 박팽년 선생의 서문에 대해 설명하시는 박정규 종친회 부회장

박 종친회 회장은학기가 시작되면 태고정은 인성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선생의 혼이 깃든 현장에서 교육을 함으로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와 닿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반 방문객들이 찾아오면 학생들로 인해 관람에 불편할 수 있겠지만 양해를 구한다. 우리 후손들이 할 일은 취금헌 할아버지를 비롯해 다섯 분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한다고 했다.

 

묘골에는 육신사 뿐만 아니라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곡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가헌 등이 있다. 도곡재(陶谷齋)는 달성을 빛낸 27명의 위인 중 한 명으로 현풍 인물 동산에서 만날 수 있는 도곡(陶谷) 박종우(朴宗佑. 1578~1654))선생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선생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선생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으로부터 수학하였으며 인조의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듣고 묘골에서 두문불출하며 질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으며 은거하였다고 하여하빈조수(河濱釣叟)’라는 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1778년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800년대 박종우 선생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라고 이름 하였다.

도곡재

삼가헌은 1769, 박팽년의 11세손인 삼가헌(三可軒)박성수(1735~1810)가 지은 초가 건물이다. 그의 아들 박광석이 초가를 헐고 다시 집을 지었고 1826년 사랑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과 연당이 건물 서편에 있다. 연당은 건물을 지을 때 필요한 흙을 파내고 난 자리에 연못을 조성한 것이다.

 

묘골 출신의 인물로는 박준규 국회의장, 세계굴지의 기업을 창업한 삼성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를 들 수 있다. 한 스님이 박두을 여사의 관상을 보고왕비가 아니면 거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지 그렇게 되었으니 족집게 스님이 아닐까 싶다.

성하의 계절 7월이면 육신사로 들어가는 길은 자미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고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을 것이다. 그때 다시 한 번 찾기로 한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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