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꽃이 가득한 산에 성현을 기리다화산서원을 찾아서

비슬신문 2023. 5. 10. 16:44
반응형

꽃이 가득한 산에 성현을 기리다

화산서원을 찾아서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관학과 사학을 들 수 있다. 관학으로는 성균관, 향교를 들 수 있고 사학으로는 서원이 대표적이다. 서원은 강학기능과 제향기능이 있는데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강학기능보다는 제향기능의 성격이 강했다. 충정이 깊은 인물을 서원에 배향함으로 문중의 결속뿐만 아니라 향촌 사림의 결속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기에 문중 측면에서도 서원의 역할이 중요했다.

 

달성군에는 타 지역보다 서원이 많다.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에 위치한 화산서원도 그 중에 하나다. 화산서원은 서원이 있기에 앞서 화산재(花山齋)가 먼저 건립되었다. 이는 곽승화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후손들에 의해 1990년에 서원으로 중건하였다.

현풍 곽씨의 문훈(門訓)은 지리(池里) 십이정려각 입구에 있는 비()에도 나와 있지만 충효세업 청백가성’(忠孝世業 淸白家聲)으로 충과 효를 대대로 물려 업으로 삼고, 청렴과 결백을 집안의 명성으로 삼아이를 대대로 바꾸지 말라고 하는데 화산서원은 이 문훈(門訓)을 잘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서원은 외삼문인 상지문(尙志門)을 지나면 강당인 화산서원, 좌우로 유래재(牖來齋), 창덕재(彰德齋)가 있고 내삼문인 도례문(導禮門),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는 현풍 곽씨 14세 손 규헌공 휘() 승화를 제향하고 있으며 17세 손 죽재공 휘 간, 예곡공 휘 율, 18세 손 괴헌공 재겸 등 네 분을 배향하고 있다.

 

 

진사 규헌선생은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는 이양서원(尼陽書院)에 배향된 곽안방(郭安邦)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한훤당 김굉필선생과 함께 점필재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이때김곽양수재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로 성품이 맑고 고고하여 사우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수재로 일컬어졌다. 도동서원의 별사(別祀)에 배신, 원개, 곽율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후,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중기 문신으로 곽승화선생의 증손자인 죽재 곽간(1529~1593)은 곽지견의 아들로 병과에 급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2년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심통원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을 이상히 여겨 그의 짐을 뒤진 후, 빼돌린 물건이 있는 것을 알고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심통원이 파직 당하자 그의 보복이 두려워 미친 사람 행색을 하고 즉시 서울을 떠나 피신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566년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문정왕후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언관의 자리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과 함께 김성일을 찾아가 함께 싸우다가 김성일이 죽고 진영이 와해되자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전사했다.

도동서원의 별사에 함께 배향되었던 예곡 곽율(1531~1593)선생도 배향되어 있다. 선생은 곽지운에게 학문을 배우고, 후에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사소한 것도 취하지 않았으며 거둬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학문을 즐겨 부임하는 곳마다 학풍을 일으켰고 풍속을 순화하는데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중에 고을의 수령으로서 왜적을 무찌르는 의병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그 후, 3개월 만에 초계군수로 임명되었다. 현풍지방을 중심으로 학행이 뛰어난 5명의 선비를 포산오현(苞山五賢)이라 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다. 저서로는 예곡문집이 있다.

 

서원에 배향된 나머지 인물은 괴헌 곽재겸(1547~1615)선생이다. 삼촌인 곽월에게 글을 배우다가 김경창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김우옹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도와 왜구 소탕의 방안을 제시하고 서사원과 협력하여 의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사촌인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이끌고 창녕의 화왕산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대구의 유호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훈자육대도(訓子六大圖)가 있다.

 

서원은 관학인 향교와 달리 사림들의 가치관처럼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에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세워졌다. 화산서원 역시 산의 경사를 따라 경사지 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민가와 구별 짓기 위한 담장이 있고 상지문(尙志門)을 통과하면 강당이 나온다. 강당 뒤는 널리 덕을 비추는 사당이라는 뜻의 경덕사(景德祠)가 높은 곳에서 후손들을 지켜주려는 듯 들을 바라보고 있다.

 

서원의 향제는 춘추로 지냈는데 유사 2, 제관 18명이 참석한다.

춘향제가 있기 며칠 전부터 문중 및 유림에서는 각출한 금액으로 유사2명이 장을 본다. 제수로는 돼지고기, 소고기, 명태, 조기, , , , 부추, 대추, 밤을 준비한다. 가격은 흥정하지 않으며 크고 깨끗한 것을 구입한다.

주소(廚所)에서 제수를 준비하는 동안, 강당에서는 제관의 역할을 나누는 분정을 한다. 삼헌관은 연령순으로 선정하고 대축은 예문에 능숙한 사람이 쓴다. 축문을 쓴 후 폐백을 준비하고 다음날 새벽 향제를 위해 재실과 강당에서 잔다. 코로나 이후 당일 향제로 바뀌었다.

집례가 제관과 제집사를 호명하고 개좌를 알리면 헌관과 제집사 등이 사당 앞에 열을 지어 선다.

찬인(贊人)은 초헌관을 동쪽 계단으로 인도한 후 진설된 것을 점검한다. 대축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서 유례를 개독한다. 집례와 찬인은 재배하고 대야에서 손을 씻고 각자의 위치에 선다.

집례는 사당 입구에서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망료례 순으로 창홀(唱笏)하며 향제를 진행한다. 전폐례는 헌관이 위폐 앞에 폐백을 드리는 예이다.

이때 알자가 각 헌관들을 안내한다. 음복례는 초헌관이 음복 위에 나아가 신이 흠향한 술과 고기를 조금씩 맛보는 예이다.

마지막으로 축문을 태운 뒤 감()에 묻는 망료례를 끝으로 향제가 끝이 난다.

향제가 끝나면 사당에서 강당으로 이동해 헌관들에게 절을 올리고 춘향제 이야기 및 전통 계승문제 등을 나눈다. 진설음식을 참석한 인원대로 나누고 향제를 종료한다.

 

지난 320일 춘향제를 지냈다.

곽병숙 종중회 회장은 코로나로 그동안 간략하게 향제를 지냈는데 금년 춘향제부터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무엇보다 기쁘다. 서원이 국가산업단지 내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규헌선생의 묘가 있는 연고지에 문중들의 뜻을 모아 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니 그래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포산 문훈(門訓)의 뜻을 기려 부끄럽지 않는 후손이 되겠다고 했다.

 

*참고문헌: 한국토지주택공사 대구도시공사 구지편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