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말이 말 같지 않으니

비슬신문 2015. 10. 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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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말 같지 않으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다. 더위를 피해 디아크(The ARC)로 차를 몰았다. 라디오를 켜노라니 북한의 언어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진행중이었다. 통일 이후에 혼란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한글이 수난을 겪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달성 문인의 시화전이 열리는 디아크에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로 붐볐다. 마음에 드는 시화 액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동영상에 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관심을 두는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 개인의 취향이든 강제된 방학숙제이든 누군가가 한 번쯤 읽어 주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 한 학생이 씹던 껌을 시화에 붙여놓고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에 큰 뿔이 솟았다. 간신히 뿔을 감추고 학생들을 불러 점잖게 타일렀다. “많은 관람객이 봐야 하는데 더럽히면 되겠느냐고. 깨끗한 너희 옷에다 껌을 붙이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껌을 붙인 학생에게는 별도로 꿀밤 한 대를 먹였다. 녀석은 못마땅한 듯 힐끗힐끗 돌아보더니 이내 휴대전화 화면에 ㅆㅂ이라 띄웠다. 녀석들은 낄낄 웃어대더니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놀림일 거라는 것을 감지했지만, 욕설이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씨발마치 전류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 일격에 당한 권투선수인 양 온몸이 휘청거렸다.

청사 앞마당에 청소년 축제가 열렸다. 행사장은 라디오 주파수가 엉키듯 소란하다. 거기에다 신나는 경쾌한 음악까지 보태져 시장판이 무색하다. 부스마다 시끌벅적 장사진을 이룬다. 참가자와 학부모 격려차 부스를 돌던 중 한 학생이 내뱉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다. “, 오링 났어(돈이 없어). 네가 좀 빌려줘!” 함께 있던 청소년 지도사도 모른다는 눈치다. 그들끼리만 통하는 은밀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라디오에서 말하던 한글의 수난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옆집으로 이사 온 우즈베키스탄 부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곤혹스러웠던 그때와 다르지가 않다. 40년 전, 우리 세대에도 은어나 속어가 없진 않았다. 꼰대(선생님), 구름과자(담배), 노가리(거짓말), 개기다(반항하다) 등이 있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 소개된 청소년들의 은어를 살펴봐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당근이죠.” 이말 때문에 겪었던 일화를 소개한 글을 보았다. 선생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해 다시 물었고 대답 역시 당근이죠라는 답변에 몹시 당황했던 일을 회고하며 언어가 형체를 잃어가고 있음을 우려했다. 말은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로 사물을 구분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회가 분화되고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단순하던 언어가 다양한 형태로 태어나고 있다. 그럴수록 정제된 말이 필요하다. 그렇다 해도 당연하다당근이지로 태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한글이 스스로 무덤을 파서야 하겠는가.

결혼을 앞둔 아들이 인사차 예비 며느리를 데리고 왔을 때다.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아서인지 00 오빠라 지칭했다. 이름 뒤에 를 붙이면 될 일인데 듣기가 민망했지만, 혼전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손자가 태어난 지 100일째 되던 날이었다. 며느리의 말투는 1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남편을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족 간에 부르는 호칭은 함부로 바꿔서 될 일인가. 오빠는 오빠일 뿐 결코 남편이 될 수 없음이다. 명확한 의미가 부여된 말을 함부로 뒤섞어 쓴다는 건 말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자 격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국적도 없는 불량한 언어의 조각들이 유성처럼 떠다니며 세대를 갈라놓는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많다는 걸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더구나 10대들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나 비속어가 많다는 게 놀랍다. 세대 차라고는 하지만 언어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에서 감흥도 신선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발랄하거나 기발한 용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몇 해 전, 이집트 문화 특별 전시회장에서 상형문자를 본 적이 있었다. 볼 수는 있었으나 까막눈이 되었던 것처럼, 10대들의 은어 앞에서 장님이었다. 언어에 대한 공통분모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말에는 동작이나 웃음까지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의태어와 의성어가 있다. 그 멋스러움은 어떤 언어도 흉내 낼 수 없다 한다. 좋은 보석일수록 닦아야 빛이 나듯 좋은 말을 쓸수록 멋이 나지 않을까. 말을 함부로 비틀거나 찢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요즘이다. 개그 프로와 오락프로 진행자, 저명강사까지도 말에 충격을 가한다. 솔직함을 과장한 위악적인 형태의 말이 범람하고 있다. 공영방송에서조차 걸러지지 않는 저급한 말이 쏟아진다.

말이 말 같지도 않은 요즘이다. 명색이 수필가란 이름으로 글쓰기를 한답시고 끙끙대고 있다. 맞춤법과 오·탈자 같은 온갖 부호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할 것 같다. 머잖아 새로운 훈민정음이라도 반포해야 할지 모른다는 머리기사가 나오기 전에.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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