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찾기
미술관은 관람객들로 줄을 이었다. 초대작가들의 작품처럼 관람객의 다양한 표정이 흥미롭다. 살짝 미소 짓기도 하고 무표정 얼굴도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단색이면서도 붉은 톤의 그림 앞에 관람객이 붐빈다. 반면 회색빛 질감이 두드러진 그림 앞에 머무는 사람은 드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명성 때문이거나 열정적인 색상이 강한 호기심을 유발한 것 같다.
유난히 붉은 장미꽃 그림 앞에 시선이 머문다. 단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강렬한 유혹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붉은 장미의 매력이랄까. 요염하다 못해 적나라한 자태다. 바라볼수록 꽃잎에 빠져들 것만 같은 아찔한 현기증이 전신을 휘감는다. 화가는 타오르는 열정을 꽃잎에 투영시킨 모양이다. 잉걸불보다 뜨거운 빛깔에 내 마음이 용해되고 있다.
모든 물질에는 고유한 빛깔을 가지고 있다 했던가. 태초에 우주는 에메랄드빛을 간직하였을 것만 같다. 은하계는 별을 쏟아 부어 하얀빛을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생명체를 가진 것들도 나름의 빛깔을 지니고 있다. 초원이 녹색이듯이 각기의 고유한 빛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언어를 가진 인간에게도 여러 가지 형태의 빛깔로 자신을 표현한다. 화가는 하얀 캔버스에 자신의 빛깔이 완벽하게 투영되기까지 수없이 붓질을 반복할 것이다. 서예가는 화선지에 검은 먹물로 자신의 존재를 표출하는데 열정을 쏟아 붓는다. 작가는 혼신을 다해 원고지 칸마다 한 글자씩 매워간다. 조각가는 단단하고 결 좋은 목재에 끌과 조각도로 특유의 재능을 아로새긴다. 도예가 역시 뜨거운 가마에서 자신의 영혼이 새겨진 도자기만을 골라낸다. 각기 다른 빛이지만 숭고함이 배어난다.
역사 속 인물에서 빛깔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성웅 이순신은 초주검이 된 몸으로도 백의종군한 연유를 무슨 색깔로 말할 수 있을까. 등잔풍화와 같은 조선을 지켜내고자 했던 마음으로 입었던 무명옷은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고통만을 생각했을 것만 같다.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 그녀는 분명 푸르른 강물을 닮았으리라. 황진이의 못다 이룬 사랑은 이슬만 먹고 곱게 피어난 산국이었을 것이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겠다며 북정가(北征歌)를 불렀던 남이 장군의 마음은 호연지기로 빛났을 것이다. 선각자와 선열의 신념은 굳건한 의지로, 애국으로, 자유와 이상(理想) 같은 온갖 빛깔로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남다른 열정과 혼을 작품에 투영한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었다. 어둡고 무거운 색채의 그림은 단조로움을 깨고 화폭을 가득 채워 활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어색해 보이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이 춤을 추듯 은은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림에서 그가 지닌 빛깔이 궁금해 큐레이터에게 물었다. 샤갈은 대체로 무게 있는 색깔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혼신을 다하는 열정이 용암처럼 꿈틀거리고 있을 거라 했다. 화산을 품은 산처럼 검정이 주는 이미지가 중후하면서도 금방 솟구쳐오를 것만 같은 검붉은 빛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에 따라 인생의 빛깔을 반추하기도 한다. 꿈 많은 청소년기를 연분홍빛이라고 한다면 혈기 왕성한 청년기는 푸른빛일 것이다. 사회적 지휘를 얻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는 시기는 황금빛일 것이며, 모든 걸 내려놓고 안식을 취할 때의 평화로운 색깔은 노란빛이 아닐까. 인 생의 빛깔도 성장 과정에 따라, 계절에 따라, 혹은 처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인생 항로보다는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이겨낸 영혼일수록 더 짙게 변화할 것이다. 그런 빛깔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져 각자의 고유한 색깔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연한 기회에 직장 후배와 차 한 잔 나누게 되었다. 후배는 최근 동료들의 근황을 전하다 말고 느닷없이 선배가 부럽다고 했다. 퇴직 후에도 늘 활기차게 다니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느냐며 추켜세웠다. 얼토당토않은 과찬에 귓불이 후끈 달아올랐다. 시력이 나쁘다는 말로 얼버무리기는 했어도 부끄러움은 한동안 회색빛으로 남아 있었다.
흐릿한 색깔로 믹서 된 사람일 바로 나일 것 같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여 매듭을 짓지 못한다. 승부근성이 약해 중도 포기도 허다하다. 계획조차 용두사미가 된 게 한둘이 아니다. 원고 마감일에 쫓겨 허둥대다 졸작을 보낼 때도 잦다. 일을 주도하기보다는 참여자 군(群)에서 즐기는 데 익숙하다. 감정을 제어하는 장치가 시원찮은지 금방 얼굴에 담아내고 만다. 아직도 애창곡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하고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른다. 허점투성인 내게도 색깔이 있긴 하는 걸까.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 있어야 주목받는 세상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만이 가진 색깔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개성을 살리면서 차별화된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일 것이다. 모두가 나름의 빛깔을 가진 것만 같은데 유독 나만이 가진 색깔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흐린 날 먼 산처럼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학식이나 행동, 혹은 뛰어난 언변이나 처세술, 또는 재치와 재능을 보면 금방 반하고 만다. 내 마음 어느 곳엔가 용해되어 있을 것 같은 그 빛깔이 무척 궁금하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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