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과 지조, 의리가 있는 선비이자 의병장
송담서원의 박대암(大庵) 선생, 불천위 제사를 지내다
선조에게 올린 16가지 항목의 상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스포츠파크에는 인물 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달성군은 달성 개청 100년을 맞아 달성을 빛낸 27명의 위인을 선정하여 이곳에 흉상을 제작하였다.
대암 박성 선생도 그 중의 한 분이시다. 선생을 기리고 있는 서원은 구지면 도동리 대니산 중턱에 자리한 송담서원이다. 대부분의 서원이 큰 길과 인접한 곳에 있는 것과 달리 도로에서 400여m 들어간 곳에 있어 지나치기 쉽지만, 길가에 표지석이 있고 멀리서도 서원 건물이 보여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서원은 선생 사후 28년 경에 여헌 장현광 선생이 발의하여 현풍 쌍계에 세웠으나 화재로 인해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였고, 그 뒤 60년 만인 숙종 19년(1693)에 사림에서 다시 발의하여 선생의 산소 아래 건립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다. 훼철될 당시 소장 전적과 각종 문서들이 함께 정리되었다. 훼철 이전의 자료 수량은 확인할 수 없지만 훼철 당시 일부 자료가 부근의 도동서원으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건물이 낡아 헐고, 1993년 자손들이 뜻을 모으고 나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서원을 복원하였지만, 정문인 덕양문(德陽門)과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건립되었고 다른 부속건물은 없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송담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에서 우측으로 100m 남짓한 거리의 비각에는 김세렴이 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선생은 명종4년(1549) 현풍 솔례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덕응(德凝), 휘는 성(惺), 호는 대암(大庵), 본관은 밀양이다. 외가는 안동 예안의 오천리이며 선생의 외숙인 김부필과 김부의는 퇴계선생의 고종형제다. 사돈으로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아들인 이응인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죽재 곽간과 훗날 도동서원의 별사에 배향되었던 낙천 배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낙천은“한훤당께서 나신 고을에 다시 훌륭한 사람이 있다”라며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부모를 대함에 있어서도 첫닭이 울면 세수하고 옷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조상의 사당인 가묘(家廟)에 참배한 후 학문에 매진하였다. 20여 년 동안 보살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삼년 상(喪)을 치러 그 효를 다했다.
선생은 19세(명종 2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수석 합격하지만 아버지 박사눌(朴思訥)의 별세 이후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공맹(孔孟)의 글을 읽으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실하게 자기를 바로 세우는 성심정기(誠心正己)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한다.
24세 때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송암 김면, 수우당 최영경, 여헌 장현광 등의 제현(諸賢)들과 도의(道義)를 논하고 심경(心經)을 강론하면서 당대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였으니 위로는 회재(晦齋), 퇴계(退溪), 남명(南冥)의 학통과 아래로는 한강(寒岡)의 학통과 두루 연결되었다.
34세 이후, 영남팔현(嶺南八賢) 및 중외(中外, 全國)7현(七賢)으로 천거되었고 왕자사부(王子師傅),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안음현감(安陰縣監), 공조정랑(工曹正郎), 임천군수(林川郡守), 형조정랑(刑曹正郎),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영천군수(永川郡守), 청송부사(靑松府使) 등 20여 차례나 많은 내·외직(內外職)에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남명집(南冥集)』의 발문에서 이황(李滉)선생을 배척한 글을 보고“세상에 선정(先正)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라며 절교하게 된다.
임진왜란은 선생의 나이 44세에 발발하였다. 초유사(招諭使) 학봉 김성일 선생이 경남 거창에 진을 쳤을 때 참모로 활약하였다. 경상우도가 함락되자 도망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의병에 참여하도록 사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을 지어 설득하고 권유하여 향병(鄕兵)을 모집하였는데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학봉 선생이 전쟁 중에 역질에 걸렸을 때 모두 피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간호하면서 그 의리를 지켰고, 정유재란 때는 비상시 임금대신 군대임무를 관할하는 체찰사였던 오리(梧里) 이원익 선생의 추대(推戴)로‘주왕산성 의병대장(周王山城義兵大將)’으로 임명되어 청송(靑松)·진보(眞寶)· 영덕(盈德) 지역을 방어하였다. 체찰사 오리 선생은 대암 선생을 "선생"이라 호칭하면서 공경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영남 사람인데 선비로 이름이 드러났다', 소학과 사서삼경을 읽어 '학행과 지조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등 선생에 관한 기록이 10여 회 나와 있다.
말년에 청송에 ‘학안재(學顔齋)’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동쪽 행랑은 사물(四勿), 서쪽 행랑은 박약(博約)이라 이름 짓고“책을 읽어도 마음에 터득하는 실제가 없으면 만 권의 책을 읽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며 논어를 즐겨 읽었고, 글을 배우러 오는 이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쳐 사람이 되는 길을 깨닫게 했다. 선생은 58세의 일기로 청송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고향인 현풍(玄風, 현재 지명 求智)으로 운구하여 대니산 자락에 묻혔다.
선생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與君小少同鄕井(여군소소동향정) 그대와 어린 시절 한 고을에서 성장하여
識面從來五十春(식면종래오십춘) 우리 얼굴 안 지 오십 년이 지났는데
漸入有如啖蔗境(점입유여담자경) 세월이 지날수록 사귀는 맛 깊어지고
同心正似斷金人(동심정사단금인) 같은 마음 단단하여 무쇠라도 자를 듯
切磋媿我姿資鈍(절차괴아자자둔) 나의 무딘 기품 자질 절차탁마 부끄럽고
直諒多君德義醇(직량다군덕의순) 그대 맑은 도덕 신의 바르고도 진실했지
隔閭還成泉壤別 (격려환성천양별) 만나본 지 오래인데 저승 작별이라니
朝天長道淚沾巾(조천장도루첨건) 천상 가는 머나먼 길 눈물로 보낸다오.
서원 관련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모두 7종 16건으로 『임안록(任案錄)』 1책, 『원임안(院任案)』 1책, 『알사록(謁祠錄)』 8책, 『심원록(尋院錄)』 3책, 『원생안(院生案)』 1책, 『유전수합기(儒錢收合記)』 1책, 명문(明文) 1건 등이 있다.
선생의 문집인 『대암집』에는 시 150여 편, 제문 10여 편, 편지글 70여 편, 묘지명으로 써준 글이 8편, 16조로 되어 있는 상소문 한 편을 포함하여 3편의 상소문 등이 실려 있다. 이 문집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전국유명대학, 유가의 서가에 소장되어 있으며, 특히 대암유사(大庵遺事)는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貴重本) 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올린 16가지 항목의 상소 내용을 살펴보면
‘대의(大義)를 밝혀 화의(和議)를 끊고, 군주가 몸소 정토(征討)하여 원수인 왜적을 섬멸하며, 잘못을 과감히 고쳐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백성의 아픔을 구휼하여 인심을 수습하며, 사부(師傅)를 가려 뽑아 동궁을 보도(補導)하고, 대신을 공경하여 회복(恢復)을 위임하며, 훌륭한 장수를 선발하여 군무를 맡기고, 간쟁(諫爭)을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열고, 좋아하고 싫어함을 바르게 하여 어진 자와 간사한 자를 구별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기강을 세우며, 절의를 표창하여 강상(綱常)을 세우고, 염치를 숭상하여 탐욕스러움을 개혁하며, 상벌을 분명히 하여 중외(中外)를 장려하고, 군법을 엄하게 시행하여 장병들을 정돈하며, 인서(仁恕)를 확대하여 억울한 옥사를 살피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군수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박중곤 대암 선생 14대 종손은 “대암 선생의 8대조 중미공이 고려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고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으로 봉군되었습니다. 대암선생의 7대조가 통정대부 화령부 소윤(和寧府小尹)으로 솔례 곽씨와 혼인하여 현풍 솔례에 정착하였다고 대암선생문집(大庵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으니 약 600 년 동안 이곳 달성군 현풍구지(達城玄風求智)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서원이 훼철되고, 화재가 나서 약 30년 전 강당과 정문이 중건되었는데 동재 서재 등 서원의 부속 건물이 빨리 건립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선생의 불천위 제사(不遷位祭祀)는 음력 10월 4일로 달성군 구지면 창리에 소재하는 선생의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 에서 지낸다.
새로운 100년의 초석을 다지는 달성군이 다가오는 봄, 미래 교육도시 실현을 위한 '달성교육재단'이 설립된다.
민선 8기 최재훈 달성군수의 '5대 정책비전' 가운데 최우선 과제인 달성교육재단 설립에 맞춰 달성 교육의 역사를 탐구하는 기획취재를 달성문화재단과 비슬신문이 함께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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