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량갓과 정자관 _ 우보 만보(漫步)

나는 여간해서 모자를 안 쓴다. 딱히 무슨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 우리 형제들이 하나같이 땀이 유별난 데다 엔간한 장식조차도 거추장스러워하는 탓이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도 한사코 모자를 안 쓰셨단다. 언젠가 중절모를 쓴 아버지 사진이 있어 웬일인가 여쭈었더니 사진관에서 빌려 찍은 거라나. 우리 아이들도 웬만하면 모자를 쓰지 않는데, 녀석들은 땀이 그다지 없는데도 이러니 거참, 별것을 다 닮는구나 싶다.
그래도 온갖 세파에 부대껴 살아야 하는 우리는 이런저런 모자를 갖추지 않을 수는 없다. 「모일某日」이라는 시에서 박목월이,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冠詞,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로 헤매였다’고 읊은 것은 절창이다. 사실 모자는 어떤 때는 ‘월계수관’처럼 빛나는 징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손오공의 머리를 옥죄는 ‘긴고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내게 주어진 첫 모자에는 다섯 형제의 ‘맏이’가 새겨져 있었다. 그걸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다고 여기던 스무 살 무렵, ‘아버지’라는 표식이 달린,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모자가 느닷없이 내게로 왔다. 그로부터 마흔 해도 더 흐른 이제야 꼬질꼬질해진 그 모자와 퍼석해진 내 모습이 어지간히 어울리게 된 것 같다. 지금 내게는 어머니 앞에서만 쓰는 모자랑 아내를 위해 쓰는 모자가 따로 있고, 당연히 밥벌이할 때 쓰는 모자도 별도로 있다. 하지만 문득 아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그들을 위한 모자가 있기는 했나 싶어 씁쓰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모자와 더불어 이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모자는 신분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상이었으며 또한 완강한 굴레였다. 청동기시대 족장의 투구나 신라의 최고 지배자가 쓰던 금관, 제왕의 면류관이나 익선관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외출할 때는 흑립을 쓰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패랭이 즉 평량갓을 썼다. 좁은 길에서 천민이 양반을 만나면 그마저 벗고 엎드리기까지 했다니, 그 비애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오죽했으면 동학 농민군이 정부에 요구한 ‘폐정개혁안’ 중에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는 것이 포함되었겠는가.

모자는 그것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유적에는 7세기 무렵 소그드 왕국에 온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그중 궁궐 서쪽 벽에 그려진 두 남성을 고구려 사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유는 그들의 모자 때문이다. 그들이 양쪽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어, 이것을 고구려 관원들의 ‘조우관’이라고 보는 것이다.
백여 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벨 로웰(1855∼1916)이 ‘단편적인 묘사만으로 조선 모자의 가치를 다 보여주기 어렵고, 품위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듯이, 조선은 가히 ‘모자의 나라’였다. 집 안에 있을 때, 외출할 때, 특별한 의식을 거행할 때 쓰는 모자가 제각각이었다. 그에 관한 범절도 무척 까다로워서 ‘의관을 정제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으리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가정에서 생활할 때는 거의 정자관을 썼다. 그 시대 초상화는 관복에다 사모를 쓴 모습이 흔하지만, 나는 수수한 옷에다 단아하게 정자관을 쓴 초상화가 보기에 더 좋다.
신분제가 없어진 오늘날에도 신사는 옷이나 여타 소품에 못잖게 흔히 다양한 모자를 멋들어지게 활용한다. 나도 이제 와서 나한테 어울리는 참한 모자가 있나 살피는 중이다. 어느새 이마에는 골이 깊이 패고, 서리를 함빡 맞은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성기어지니 그 몰골을 가리고 싶은 마음이 난들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게 그리 수월할 것 같지 않다.
예전이라면, 선비들이 즐겨 쓰던 이단이나 삼단의 정자관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하더라도 단출한 단층 정자관 정도면 그럴듯하지 않겠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려니와 내 처지에는 감당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야장천 등산모나 벙거지 같은 것만 뒤집어쓸 수도 없으니…. 엉성한 인품과 헐렁한 행동을 감출 모자를 찾는 일이 애당초 글렀다면, 하루가 다르게 훤해지는 정수리에다 남들처럼 가발이나 하나 얹을까 생각하며 거푸 쓴입을 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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