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동나무 책꽂이 _ 우보 만보(漫步)
하 종 혁

“왜 맨날 내 책만 가지고 그래, 생전 거들떠보지 않는 당신 책은 놔두고.”
서가를 정리하다 으레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큰소리가 났다. 새로 생긴 책을 둘 데가 마땅찮아 꽉 찬 책꽂이를 비워야 할 형편이라, 혹시나 해서 떠본 건데 돌아온 답은 역시였다. 쓴 입 다시며 물러설밖에.
하릴없이 책을 꽂았다 뺏다 하다가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얄팍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몇 장을 뒤적이다 보니 ‘간서치전看書痴傳’이 있었다. ‘책만 아는 바보’라는 뜻이다. 오직 책 보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는 물론 배고픔조차 잊고 살았던 이덕무(1741∼1793)가 쓴 자신의 전기다. 이 책을 들먹이며 나를 그와 견주고자 하는 뜻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한마디로 언감생심이다. 어슴푸레한 장면 몇몇이 슬쩍 지나간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쩌다 만화에 온정신이 빠졌다. 만화라면 아예 책으로 여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린이날에 만화를 잔뜩 쌓아 요란스럽게 불태우던 퍼포먼스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동네에 있는 만화방에는 더 볼 책이 없을 만큼 뻔질나게 드나들다가 나중에는 이웃 동네까지 기웃거리게 되었다. 엄마한테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결국엔 아버지의 호주머니까지 넘보고 말았다. 기어이 책가방이 아궁이에 들어가는 꼴을 당하고서야 만화와 헤어졌다.
두 번째, 내가 이만큼이라도 책과 가까이 지내게 된 연유는 오로지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덕이다. 빚쟁이들이 아침저녁으로 집에 들락거리는 통에 마음 붙일 데가 없어 겉돌던 나를 붙잡아주신 분이었다. 당신께서는 내 손을 이끌고 당신의 방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을 가리키며 마음껏 읽으라고 하셨다. 여태 구경도 하지 못한 양장판의 책이 가득했는데,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을 읽으려는 욕심에 더해 당신의 그윽한 분 냄새를 쫓아 선생님 댁을 주살나게 드나들었다. 선생님은 가끔 당신의 아들에게 줄 과자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밤이 이슥하도록 읽은 책장을 거푸 되넘기고는 했었다.
다음, 대학에 입학하여 중앙도서관의 서가를 빼곡히 채운 책들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들뜬 기분을 여태껏 잊을 수 없다. 이제는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겠거니 싶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웬걸, 그런 호사도 내게는 과분했던 모양이다. 바라던 학과에 진학한 후 처음 맞은 여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얄궂은 운명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졸지에 빈 아버지의 자리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고, 휴학하고 임시직 주유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팍팍하던 시절, 얄팍한 월급봉투를 쪼개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던 시간을 왜 그리 기다렸던지. 그때는 책을 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는데 책에 왜 그토록 욕심을 냈는지 모르겠다.
에멜무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펼쳤다. 손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 책갈피에 빛바랜 메모지가 꽂혀 있었다. 사십 년도 더 된 것이라 무엇을 생각하며 긁적인 것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밤낮이 바뀐 퇴근 시간 이후,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버텨가며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무채색 슬라이드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바로 옆에 고운 뒤태를 슬쩍 감추고 수줍게 곁눈질하는 새색시와 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덧댄 겉장을 조심스레 넘기니 처녀의 뽀얀 속살 같은 내지가 살포시 드러난다. 아, 그토록 오랜 시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이대로 내버려두었다니….

다리에 힘이 풀려 책장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책을 품은 책꽂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태 후에 당신과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손수 짜주신 것이다. 쇠못은 아예 사용하지 않았고, 전통 방식 그대로 옻칠한 기품 있는 오동나무 책꽂이다.
‘틈나는 대로 아랫단 서랍을 곧 짜 줌세.’
그러나 그 책꽂이에는 여태 서랍이 없다. 당신은 그리 말씀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그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까맣게 묻혔던 슬픔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고개를 무릎에 깊이 파묻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나.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애꿎은 책장만 넘기면 뭘 해, 결국 그대로 둘 거면서.”
빈정대는 소리가 아무리 거슬려도 이럴 땐 못 들은 양 가만있는 것이 상책이다.
#간서지천 #하종혁 #이덕무 #오동나무 #책꽂이
https://thepeoplemagazine.co.kr/detail.php?number=18315
: 더피플매거진
[오피니언] 오동나무 책꽂이 _ 우보 만보(漫步) 하 종 혁 “왜 맨날 내 책만 가지고 그래, 생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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