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연지에 큰 별이 뜨다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관중석에서 와와 하는 환호가 쏟아진다. 연이어 귀에 익은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만면에 웃음을 띤 사회자는 구순의 영원한 오빠 송해 선생이다.
일요일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전국노래자랑 프로에 채널을 고정한다. 평소 텔레비전 시청과는 촌수가 멀지만, 이 프로만큼은 예외다. 소박하게 꾸며진 무대에는 열광적인 환호와 환희가 있다. 땡~ 소리에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출연자 모두 넘치는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한다. 촌로를 닮은 노인이 쏟아내는 구수한 입담과 재치에 출연자는 물론 관객과 시청자까지 자지러진다. 무대에서만큼은 출연자와 하나가 되려는 선생의 딴따라 기질 때문인가 싶다.
송해 선생께서 전국노래자랑 프로에 사회자로 승차한 1988년 5월은 외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다. 누구나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상처나 시련이 있지만, 선생은 생애 전부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얼룩졌기에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27년이란 긴 세월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음이 놀랍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출연자와 똑같은 눈높이로 척척 호흡을 맞추며 매끄럽게 진행을 이어간다. 혹자는 코미디의 진수라 불리는 ‘웃찾사’나 ‘개콘’보다 더 진한 웃음을 준다고 한다.
송해 선생과의 첫 만남은 2000년 9월 5일로 기억된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다. 전국노래자랑 녹화를 위해 일행이 묵을 D 호텔 로비에서 기다렸다. 건축한 지 오래된 호텔이라 귀빈을 모시기에는 너무 누추해 결례를 범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약한 방 하나를 선생의 숙소로 정했다. 도착하자마자 방부터 둘러본 선생은 벌컥 화를 냈다. “혼자 잘 방인데 이렇게 크면 되겠느냐. 당장 작은 방으로 교체해 달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소박한 삶을 살아왔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그 날 저녁, 기관장과의 식사 중에 반주로 소주 3병을 가볍게 비웠다. 일행 모두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선생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시 숙소 인근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두 병을 더 마시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구순의 나이에 과한 주량임에도 꼿꼿했다. 술에 관한 한 선생은 주선(酒仙)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내일 녹화에 차질이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담당 계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장님, 송해 선생님 벌써 녹화현장에 나왔어요,” “뭐 누가 나왔다고, 송해 선생님이 왜 나왔는데….” 녹화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궁금증이 날개를 달았다. 간소복 차림을 한 선생은 관중석 주변을 돌며 돌멩이를 직접 줍고 있었다. 여러 차례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일이라며 멈추지 않았다. 실은 어제 호텔에서 건넨 A4 한 장 분량의 군정 소개 자료는 잊은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녹화가 시작되었다. 군정을 어떤 방법으로 소개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분명 대본을 보고 읽을 거라고 예단했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원고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속사포 같은 언변으로 달성군을 소개했다. 환호와 박수 소리에 안도했다. 왜 선생을 한국 최고의 사회자라 칭송하는지. 스스로 딴따라라 칭했지만, 최고의 연예인으로 존경받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선생의 삶은 그야말로 격정의 현대사가 녹아나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치하에 태어났고 6. 25 전란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님과 누이동생을 잃었다. 설움과 멸시 속에서도 최고의 딴따라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다.
선생의 친구는 길거리 짐꾼이고 파고다 공원을 지키는 누추한 행색의 노인이다. 선생은 의지할 곳 없어 쓸쓸하게 지내는 퇴역한 연예인의 대부(代父)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다. 그야말로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며 값진 보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이다. 어느 연예인보다 유명한 대스타임에도 대중사우나를 즐기고 3,500원짜리 이발과 2,000원짜리 해장국 좋아한다. 어떤 연기자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선생의 건강비법 또한 남다르다. 초지일관 BMW를 애용하는 초인이다. 집을 나서면 버스와 지하철과 걷기를 즐긴다. 범인(凡人)이면서도 범인일 수 없는 선생은 만인의 연인이자 연예계의 지존으로 우뚝 서 있다. 좌절을 모르는 오뚝이 인생이다.
선생은 달성군 편 방송을 계기로 군과 첫 인연을 맺었다. 군의 홍보대사, 명예 군민, 선생의 요청으로 탑골공원에 심은 구지 산(産) 소나무가 돈독한 관계임을 증명해준다. 김문오 군수와의 각별한 친분은 20만 군민과 탄탄한 연결고리로 이어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송해 공원 왜 짓나” “송해 선생 구순 선물로 공원 조성” 지역의 유력한 두 일간지에 실린 머리기사다. 상반된 내용 때문에 군민이 헷갈릴 수 있다.
21세기는 사람 중심의 마케팅 시대이다. 지자체 역시 명망 있는 지역 출신을 모델로 내세우기도 한다. 인기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는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까지 모델로 활용하는 데 혈안이다. 송해 선생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연고가 없는 셈이다. 선생의 아내인 석옥이 여사의 고향이 바로 이곳 옥포면 기세리다. 그의 유택지도 옥연지를 품고 있는 산자락에 마련되어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공원조성을 허락한 것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 선생의 각별한 배려일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대스타의 이름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자 영광이 아닐까. 지명을 딴 옥포공원, 옥연지 공원이라 명명한들 얼마나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얼마 후면 옥연지 주변 47,300㎡가 ‘송해공원’으로 탄생할 예정이라 한다. 수변에는 둘레길이 생기고 기념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송해 오빠의 팬들로 성황을 이룰 것이다. 이곳에서 선생의 노래 “나팔꽃 인생”을 들으며 전국노래자랑을 추억하지 않을까. 또 하나의 명소가 관광 달성의 이미지를 한층 더 높게 할 것이다.
옥빛 물을 담은 옥연지 하늘에 ‘송해’라는 영원히 빛나는 큰 별 하나가 떠 있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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