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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비슬신문 2015. 4. 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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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부르릉’ ‘부릉마당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굉음에 식구들이 놀라 일어났다. 어머니는 바깥 상황을 파악했는지 잽싸게 마당으로 나가 맨발로 종형을 맞이했다. “아이쿠 조카, 이 추운데 오토바이를 타고, 몸이 얼음장 같구나. 어이 들어가자.” 어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형님을 부축하듯 아랫목에 앉게 하였다. 저녁밥을 지은 연후라 방안은 온기로 가득한데도 어머니는 유별나게 춥다며 부산을 떨었다. “어데서 술을 그리 많이 퍼 마셨노.” “오토바이 탈 때는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쯧쯧아버지의 노기 띤 목소리가 한순간 방안을 싸늘하게 식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시던 밥상을 물리고 사랑채로 휭하니 나가셨다. 형님은 반쯤 감긴 눈으로 삼촌 미안합니다.말꼬리를 흐렸다.

완고하신 백부께서는 먹고살기도 벅찬데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지금까지 공납금 대느라 내 등이 휘었다.”며 진학을 포기하라 윽박질렀다. 아버지는 장조카의 머리가 아깝다며 대학공부를 책임지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진학했다. 명문고를 나온 수재답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면 소재지 장터에 동물병원을 열었다. 형님의 호방한 성격은 누구와도 쉽게 동화되었다. 가족을 대하듯 호칭도 형수, 형님, 아지매, 아재로 불렀다. 최초의 학사장교(ROTC)답게 용모가 준수한 호남이었다. 명성만큼 돈도 잘 번데다 성품까지 좋아 입지(立志)의 수의사를 부러워했다. 해박한 지식에다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날로 높아갔다.

 

소는 농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가족처럼 대우받던 짐승이었다. 소가 아프다는 건 생계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수의사는 생계에 가장 영향을 주었다. 연락을 받으면 언제든지 달려갔다. 수 십리를 달려가도 가정 형편이 딱하면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장날에는 농가에서 깨와 콩, 고추를 보내오기도 했다. K 수의사로부터 도살 진단을 받은 소를 형님이 수술로 살렸다는 입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유명세만큼 밤낮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인근 고령, 합천까지 왕진해야 할 만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지치지 않는 열정과 언변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두가 놀라워했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형님은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념으로 나에게 한 아름 선물을 안겼다. 공책과 모나미 잉크, 펜과 한 질의 소설전집이었다. 책 속에 길이 있으니 어디를 가든 가지고 다니며 읽으라 했다. 그러겠노라 했지만, 책 속에 길이 뭔지를 알아채지 못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 큰댁에 들릴 때마다 너거 큰 형님처럼 공부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어머니도 걸핏하면 아이쿠! 이놈아, 큰집 형 반만 닮아라.”며 부아를 돋웠다. 그때마다 형님이 뭔데 하고 대들곤 했다.

평소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형님을 두고 큰일을 해낼 제목이라고 추켜세웠다. 근방 오십 리 안에는 이만한 인물이 없을 거라고도 했다. 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한문에 능해 향교 전교와 학교장, 의사까지 지역의 명망 있는 유림과 교분을 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군수도 백부님께 장한 아들을 뒀다며 부러워했다. 언제나 논리정연한 말솜씨와 좌중을 아우르는 재치며, 거기에다 주종불문(酒種不問)의 장부 기질 때문이었으리라.

 

전화를 받던 아버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 조카가 사고 났어. 의식이 없다고?” 수화기를 든 손이 심하게 떨렸다. 큰댁에는 알리지 말라는 말만 남긴 채 황급히 집을 나선 아버지는 다음날에야 캥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큰일이야, 술이 원수야. 죽지 않은 것은 천운이야 천운독백처럼 내뱉는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표정은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형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집착에 가까워 보였다. 궁핍한 시절의 농촌은 먹거리가 변변치 못했다. 더구나 손님에게 대접할 수 있는 건 집에서 빚은 동동주뿐이었다. 그날도 진료를 끝내고 마신 술이 화근이었다. 비포장 길에서 당한 사고로 오랜 시간 병상에서 보냈다.

 

얄궂은 운명일까? 대형교통사고를 당했다. 믿기지 않는 참화였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 나이에 아끼던 딸과 사위, 외손자와 함께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황망했고 장례식 내내 울음바다였다. 아버지와 형님마저 없는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캄캄한 밤을 항해하던 배가 한순간에 선장을 잃고 표류하는 그곳에 조종간을 잡은 내가 떨고 있었다. 기댈 곳을 잃은 아이처럼 한동안 방황했다. 형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매서운 칼바람 속에 내쳐진 것처럼 얼마나 힘들었을까. 곱기만 하던 얼굴에 굵은 주름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겪었을 고통의 흔적인가 싶었다. 남편이 남겨둔 삶의 흔적들을 보듬으며, 홀몸으로 이십여 년의 풍상을 버겁게 이고 왔을 것이다. 삶에 갈피마다 켜켜이 쌓인 각고를 어찌 지워낼 수 있으랴.

 

선거운동 기간에 형님이 활동했던 지역을 찾았다. 세월이 흘렀어도 종형은 그곳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형님이 누볐던 집집에는 이름 세자가 편액처럼 걸려있었다. 떨떠름한 사람도, 상대하기 거북한 사람도 형님의 이름만으로도 반색하며 맞아 주었다. 명성은 진실한 삶에서 얻어지는가보다. 아버지가 그토록 믿고 기대했는지를 그때야 깨달았다.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는 형수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하다. “아지뱀, 이제 이 사람 대신 집안을 일으켜 주소.” 형수 스스로 형님 안에 가둔 삶의 족쇄를 푼 모양이다. 그 품이 얼마나 넓었기에 이제야 닻을 내릴까. 우리 곁에 큰 나무로 우뚝 서 있는 종형이다.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 올 것만 같다. “형님, 사랑합니다.” 청명한 하늘에 형님의 넉넉한 웃음이 번진다.

*아지뱀 : 결혼한 시동생을 부르는 경상도지역 사투리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군 안전행정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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