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보석
환상적인 마술이 펼쳐진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흰 구름 떼가 쪽빛 하늘에 수를 놓는다. 조명등에서 쏟아져 나오듯 강렬한 햇살이 구름을 뚫고 소금호수 수면에 시리도록 하얀 우유를 쏟아 낸다.
한낮에 만난 소금호수다. 눈부실 만큼 하얀 호수가 그려내는 수채화에 탄성을 지른다. 맨발로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신부의 하얀 드레스인가. 실루엣 같이 펼쳐진 호수를 마음껏 걷고 싶었다. 발바닥에 전해 오는 촉감이 야릇하다. 딱딱하리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촉감이 부드럽다. 소금을 한 움큼 쥐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본다. 덩어리가 쉽게 바스러진다. 종일 강렬한 햇살을 온몸으로 안아서일까. 얼음처럼 차가울 것만 같았는데 뜻밖에 온기가 전해 온다. 눈앞에 펼쳐진 이 광활한 호수가 소금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일행들의 감탄사가 한동안 수면 위에 내려앉는다.
앙카라에서 가파도키아로 이동 중에 만난 투즈괼(Tus golu) 소금호수다.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입구 안내판에는 영어와 일어 등 6개 나라의 언어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이 없어 서운하다. 아직은 국제무대에 명함을 내밀기에는 키가 작은 모양이다. 주차장 한편에는 작은 상점 몇 개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실내는 소금을 원료로 하는 제품들로 가득하다. 어설프게 진열된 모습은 우리의 시골장터나 구멍가게 수준이다. 한국 관광객인 줄 알았는지 “여드름이 없어요, 예뻐져요.” 서툰 우리말로 화장품 판매에 흥을 돋운다. 손등에 난 시커먼 털이 징그럽지만 눈웃음만큼은 예쁘다. 여성에게는 하얀 액체를 손바닥에 듬뿍 짜준다. 소금처럼 끈적끈적하지만. 손을 문지른 후 물로 씻어내면 윤기가 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점원의 헙수룩한 행색에 구매욕을 상실했는지 모두 눈요기만 하고 만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소금을 두 손 수북하게 담아 허공에 뿌려본다. 투명한 결정체는 검은 비로드 천위에 놓인 보석처럼 허공에서 빛난다. 미인의 하얀 치아인양 깨끗하다. 자신을 스스로 녹여 부패를 막아 주는 소금이 아니던가. 한 때 아홉 번을 구운 소금이 건강 보조제로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거금을 주고 구입해 복용한 적이 있었다. 효능은 알 수 없었지만 구운 소금 예찬론자들은 소금을 만병통치약인양 권했다. 요즘은 짠 음식이 성인병의 주범으로 낙인 찍혀 소금은 식단에서 밀려난 신세다. 고혈압으로 진료를 받고 있는 터라 의식적으로 짠 음식을 멀리하고 있다. 간고등어, 김장김치, 장아찌를 즐겨 먹던 식성을 줄이고 있긴 하지만 어디 소금 없이는 인류가 존재할 수는 있었을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금 세 가지는 황금, 소금, 지금이라는 가이드 말이 떠올랐다. 황금이란 물질은 녹슬지 않는 데 가치가 있어 신분 과시용으로 각광을 받았다. 금제로 만든 팔찌며 목걸이와 귀걸이처럼 사치품은 오늘날에도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금은 인간의 생사와 직결된 물질이다. 식단에 없어서는 안 될 존귀한 존재다. 셀러리, 샐러드란 음식도 솔저, 잘츠부르크, 솔트레이크시티라는 도시이름도 소금을 뜻하는 ‘솔트’와 관련되어 있다. 셀러리와 솔저는 로마 시대에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한 것에서, 샐러드는 신선한 야채에 소금을 뿌려 먹는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세 이전에는 화폐나 세금의 수단으로 활용될 만큼 귀했다. 간디의 무저항 독립운동도 영국의 소금 통제에 대한 저항이다. 결국, 인도 전역을 뜨겁게 달군 독립운동도 입맛과 식탁을 풍성하게 한데서 비롯됐다. 무색, 무향, 무취의 상징성을 지닌 소금은 하얀 보석이자 자신을 녹여 세상의 모든 것을 썩지 않게 하는 물약이 아니던가.
호수 안쪽에도 흰 결정체가 물속에 녹아있다. 더러는 흙모래에 엉켜 한 몸을 이룬다. 투명한 물에 잠겨 있어도 차갑게 보이진 않는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눈을 밟듯 뽀드득거린다. 흰 모시옷을 입은 여인의 옷자락을 밟듯 기분이 싸해온다. 일행들도 발바닥에 전해오는 전율에 함박웃음 짓는다. 가끔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습해진 옷자락을 흔들고 간다. 호수를 바라보는 이 순간만큼은 마음에 걸어 둔 빗장이 열리는 듯하다. 온갖 근심과 시름도 바람에 날릴 수 있을 것만 같다. 포용, 감사, 기쁨, 용서와 화해 같은 긍정적인 언어들이 내 안에 밀려든다. 세상에 모든 것을 품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는다. 밀려오는 하얀 포말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게 해 달라며 기도한다.
보검이 대장장이에게 수천 번에 걸쳐 숯불에 달궈지고 망치질 당한 후에야 탄생하듯 소금도 이글거리는 태양에 혹독하게 담금질 되고서야 눈부시게 하얀 사각의 결정체로 태어난다. 불순물이 없는 순수함이 소금의 본질이다. 순백의 모습으로 홀로 존재하지만, 결코 어울리지 않고는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홀로는 건강의 주적이 되어 외면당하지만 어울리기만 하면 그 속에 형체도 없이 녹아드는 겸손함이 있다. 한 가지 맛에 잡착하기보다는 다양한 재료와 어울려 그윽한 국화향 같은 맛의 깊이를 더해 준다. 금방 퍼 올린 싱싱한 샘물에 녹아난 미네랄 같은 하얀 보석은 맛의 조율사이다.
아직도 일상의 삶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을 몰두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내가 우선이고 남은 그 다음이다.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소금은 유형이긴 하지만 무형으로 있을 때 가치가 빛난다. 저 소금처럼 용해되어 맛내는 사람으로 남을 순 없을까.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前달성군 안전행정국장) 서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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