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린 손가락 하나

비슬신문 2015. 2. 1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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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정길 Essay 4>

시린 손가락 하나

 

아들의 들뜬 목소리가 온몸을 화하게 한다.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것이다. 휴대폰에 실려 온 사진에는 알 듯 모를 듯한 형체를 유심히 쳐다본다. 사진에서 어릴 때 아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일전에 성당 일로 원로 회장님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항상 인자했던 모습이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독한 신앙심은 신자들의 표양이었고 사회에서도 모범적인 언행을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였다. 혹 건강 때문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연유를 여쭈었더니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아들과의 의견 충돌이 부부 사이까지 힘들게 한다며 씁쓸해하셨다. 잉꼬부부에게도 남모를 아픔 하나 정도는 안고 사는 것 같았다.

 

내게도 오랫동안 숨겨온 시린 아픔이 있었다. 유독 병치레가 잦았던 아들 때문이다. 여섯 살이 되던 해까지는 열 경기(Heat Exhaustion)로 한 달이 멀다 하고 혼절해 가족을 불안하게 했다. 아프지 않고 또래들과 어울려 다니기만을 바랐다. 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였다. 우리 부부가 4일간 선진지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아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고 어머니도 잔뜩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그동안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음이 감지되었다. 한참 후에야 어머니는 그간 있었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나흘 동안 등교를 하지 않았다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니 자식이니 니 맘대로 해라.” “누굴 닮아 저리 고집이 센지.” “쯧쯧화가 단단히 난 어머니는 잘 타일러 보라는 말만 남긴 채 곧장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순간 머리 꼭대기에 황소 뿔이 솟았다. 어리다 해도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묵과 할 수 없었다. 매질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뿔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녀석은 초등학교 내내 학원 문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학기 말이 되어도 책은 금방 제본소에서 나온 것처럼 깨끗했다. 메모장에는 연필 자국도 남기지 않았다. 숙제하라 다그치면 책상에 엎드린 채 잠만 잤다. 혼자서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일이 없을 정도로 퍼즐이나 큐브 맞추는 놀이에 푹 빠졌다. 새로운 퍼즐을 보면 눈빛이 달라질 만큼 호기심을 보였고 빠른 손놀림은 신기에 가까웠다. 학년이 바뀌어도 공부에 대한 무관심은 변함이 없었다. 산만한 태도가 선생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곤 했다.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매를 맞아도 내색조차 않는 태연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달래도 보고 꾸짖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친구들은 부모 살림을 걱정해 주는 효자 났다며 농을 건넸지만, 그 말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애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오리무중이었다. 집 주변 골목길을 샅샅이 누볐지만 허사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애간장이 다 녹는 듯했다. 불길한 생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는데 직장 일에만 매달린 게 후회되었다. 녀석은 밤늦게 캥한 눈으로 돌아왔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주머니를 다 비우고서야 돌아온 것이다. 또 회초리를 들었다. 녀석의 종아리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용서해 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매를 내려놓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멈출 수도 없고 더 때릴 수도 없어 나도 울었다. 자식을 매로 다스려야 하는 부모의 맘을 누가 알아주랴.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부부는 또 머리에 뿔 하나씩 달았다. 성적은 인문계와 실업계의 경계 선상에 머물렀다. 어디를 보내느냐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체면을 이유로 인문계를 고집한 아내와 공부와 담을 쌓았으니 실업계나 보내자는 내 의견이 불꽃을 일으켰다. 정작 녀석은 진학문제에 관심조차 없었고 책상 위에는 기기 부속만이 쌓여갔다. 철없는 자식을 생각하니 분노의 뿔 하나가 더 솟아올랐다. “이 자슥 누굴 닮았는지, 돌대가리 같은 놈이 한마디가 화근이었다. 부부사이에 한랭 전선은 천둥과 번개가 교차된 채 몇 날 동안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D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학교생활은 순항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달라진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고 군 복무 후에는 외국계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학이 딸린다는 이유로 일 년도 안 돼 퇴사했다. 방에서 뒹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녀석보다 내가 안달이 났다. 대화로는 내 감정의 파고를 잠재울 수 없을 것만 같아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실패는 달리다 넘어졌을 때 달리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다. 사나이가 칼을 뺐으면 끝장을 봐야지. 실패가 두려워 도전 못하는 꽁생원이 되지 마라. 어쨌든 너는 성공해도 실패해도 내 자식이다. 다만 도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내 자식답지 않다.” 그 후 스스로 아프리카로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취업시험에서 번번이 쓴잔을 마셨다. 또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 한숨만 어둠처럼 짙어져 갔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녀석은 D조선사 입사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한동안 울먹였다. 내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

 

부모란 자식과 함께 수없이 절망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온전한 부모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지,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손가락 하나가 시려 온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군 안전행정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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