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눔
나눔, 참으로 멋진 말이다. 나눔에는 따스함과 정겨움과 웃음이 녹아나 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사 온 설빔을 꺼내 입었을 때의 기분처럼 나눔이란 말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운 토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한 채 노부부가 사는 시골집으로 향한다. 한 달여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길섶 나목은 제법 차가워진 바람에 잎을 떨구며 겨울 채비를 하고 있다. 허술한 슬레이트집이라 나목처럼 떨고 있지는 않은 지 걱정이 앞선다. 청력을 잃은 상태라고 안부조차 미룬 것이 못내 찜찜하다.
방문 앞에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다. 할머니는 일찍 마실 나간 모양이다. 어두침침한 방에는 기력을 잃은 할아버지의 가느다란 기침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낮은 천정에 매달린 희미한 형광등은 할아버지를 지키느라 맥이 풀린 듯하다. 그나마 작은 봉창을 간신히 뚫고 들어온 실낱같은 햇살이 어둠을 몰아낸다. 한 가닥 햇살에 머물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무언가 갈망하는 눈빛을 외면한 채 건성으로 안부만 물었다.
목도리를 벗자 냉기가 목덜미에 내려앉는다. 아랫목에만 겨우 온기가 머문다. 아내는 꽉 막아둔 연탄 화덕 공기구멍을 열어젖힌다. 연탄이 넉넉하게 쌓여 있는데도 연료비를 아끼느라 막아둔 모양이다.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동공마저 흐릿해져 있다. 한 달 전보다 더 야윈 모습에 마음이 아리다. 방안은 비릿하고 지린 냄새로 배어있다. 가급적 들숨을 길게 한다. 미수를 넘긴 데다 쇠약하여 올겨울을 이겨낼까 싶다. 경로당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냅다 소리를 지른다. “요강을 두고도 왜 오줌을 싸대느냐”라며 역정을 낸다. “영감, 이제 마 같이 죽자.” 할머니가 토해 내는 안타까움에도 꿈적도 않는다. 하기야 제 몸 하나 버텨내기 버거울 텐데 수발까지 들어주어야 하니 오죽하랴 싶다.
부엌 구석에 둔 찬장을 방 가까이에 옮기고 그릇은 죄다 뜨거운 물에 튀긴 다음 주방세제로 닦는다. 담요와 이불은 빨랫줄에 걸어 막대기로 먼지를 턴다. 호래자식 다루듯 막대기로 양쪽을 번갈아 가며 친다. 먼지와 구릿한 냄새가 깜짝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듯하다. 방 구석구석까지 걸레질 하는 동안 이마에는 송골송골 한 땀방울이 맺힌다. 준비해간 밑반찬과 생필품 몇 가지를 전하고 다시 오겠노라 인사를 할 때다.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한 손으로 내 손을 잡는다. “젊은 양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해주고 가.” 뿌리치기에는 너무나 간절한 음성이다. 한동안 건성으로 대답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할 때쯤 할아버지 음성이 귓가에 머문다. “젊은 양반 고마워, 달성 서씨라 했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있지만 얼굴에서 미소가 번진다. 흔들리듯 떨리는 목소리지만 평온함이 전해진다. 짐작건대, 가슴에 묻어둔 답답했던 심경을 토로한 탈출구를 내게서 찾은 모양이다.
젊은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등이 휘도록 일한 보람을 자랑했다. 자녀들의 성공은 자신이 이룬 꿈처럼 대견해 하던 할아버지셨다. 자녀들이 직장을 따라 떠난 대다 내왕마저 뜸해지자 말수를 잃었다고 한다. “가슴에 쌓아 두기만 했지 창피해서 내뱉을 수 없었어.” “병든 육신보다 이바구 할 사람이 없어 더 슬퍼.” 가슴에 켜켜이 쌓아둔 아픔을 30년 만에 풀었다고 했다. 정작 촌로에게 필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도 따뜻한 방도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게서 외로움과 고독은 독방에 감금된 죄수의 마음보다 더 무겁고 무서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듬해 봄빛이 대지를 깨우던 때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통곡을 뒤로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그때만큼은 얼굴에 맑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겹다고 아내에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부끄러웠다.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진정한 봉사와 나눔이 뭔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요즘 이 사회를 아우르는 화두는 단연 복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양극화의 골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눔이다. 나눔은 나뉨을 없애준다고 한다. 돈만으로는 약자의 고독과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없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면 복지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사회복지에 한발 앞선 유럽과 일본은 재능을 가진 자원봉사자의 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봉사야말로 나눔의 요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재능기부자가 늘어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봉사단체란 이름을 걸고 생색만 내는 기부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얼굴 알리기식 봉사는 곤란하다.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듯 이웃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복지(福祉)가 복지(腹脂)라는 비아냥거림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삶에 지쳐있는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배려의 마음을 담아 봄은 어떨까.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돕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자야말로 진정한 천사라 했다. 꽁꽁 언 대지를 녹이는 봄바람처럼 내 마음에도 따뜻함이 봄꽃처럼 피어나면 좋겠다. 웃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너와 나를 하나 되게 하는 매력에 취하고 싶다.
오늘도 할아버지의 미소를 떠올리며 집을 나선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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