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人 서정길 Essay - 40화 - 물에 대한 단상
영국사로 가는 주차장을 벗어나자 비포장 오솔길이 나온다. 길 양편에 걸린 하얀 천에는 시인들이 빚어낸 언어가 행락객을 부르고 있다. 언어의 유혹에 잠시 눈길을 주는 사이 일행은 저만치 앞서 간다. 이마에 땀방울을 훔치며 숨을 고를 때였다. 높은음의 물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그 소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십여 미터 남짓한 폭포다. 물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바위를 타고 소에 안착한다. 두 번 살짝 비틀어 내리는 가는 물줄기가 소에 이르러서야 호흡을 가다듬는다. 하얀 물보라 속에 두 손을 담근다. 손끝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짜릿하다. 차가운 기운이 금세 심장까지 파고든다. 일시에 오감이 환희에 빠져든 것 같다. 산중에서 만나는 물은 늘 막역한 친구처럼 반갑다.
나무 그늘에 있는 펀펀한 바위를 찾아 엉덩이를 걸친다. 한 줄기 바람이 목덜미를 스쳐간다. 가지의 몸놀림에 따라 잎들이 춤사위를 펼친다. 햇살은 용케도 잎 사이를 관통해 수면에 내려앉는다. 물도 신명을 느끼는 걸까. 발가벗고 소에 돌진하면서도 경쾌한 목소리로 합창을 이어간다. 소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돈 물은 내 시선을 의식한 걸까. 바위틈 사이로 나신을 숨긴다. 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안해진다. 누구로부터도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춤사위인가 싶다.
여름 방학 때였다. D 동아리에서 하계 수련회를 위해 팔공산 자락에 머문 적이 있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분임조별로 동봉을 오르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조원과 함께 가벼운 걸음으로 출발했다. 부도암을 지나 계곡을 타고 오를 때였다. 발아래는 물이끼와 부식된 낙엽이 쌓여 바닥이 꽤 미끄러웠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지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순간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계곡 바닥으로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겹질리고 말았다. 등산로가 아닌 계곡을 택한 게 화근을 불렀다. 주물러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일행을 먼저 오르게 한 후 고인 물에 발을 담갔다. 사방이 고요하다 싶었는데 실개천에서나 들을 수 있는 물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졸졸졸 단조로운 소리에 청각은 더욱 섬세해졌다. 실로폰을 두드리듯 가벼운 음이 끊일 듯 이어지고 있었다. 통증이 잦아지면 빨리 뒤따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느새 조급함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감노라니 귓가에 머물던 물소리가 폐부까지 적셨다. 듣는 것에서 느낌으로 전이되자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물소리는 마치 홀로 촛불만을 밝힌 채 드리는 기도처럼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1978년 9월, 새벽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는 자정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우레와 같은 요란한 소리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하천 곳곳이 범람하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순간에 옥토가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때마침 아버지를 떠나보낸 직후라 마음이 허전하고 어수선했다. 가진 것 모두 다 잃고만 아이처럼 방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관혼상제라는 거대한 비바람은 허허벌판에 홀로 선 나를 향해 집요하게 불어 닥쳤다. 그곳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보지만, 현실은 한 발짝도 빠져나가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자투성이인 부고장을 전해 받을 때면 긴 한숨부터 나왔다. 발인, 대부인, 호상, 숙환… 겨우 읽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하기 쉬운 한글을 두고 어려운 한자에 집착하는 어른들이 야속했다. 더구나 상문 때 향을 사르고 마른 침을 삼키며 곡(哭)을 하는 것이나, 뒷걸음질로 빈소를 나와야 하는 예법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만용을 부렸다. 어깨에 걸머진 삶의 무게를 홍수에 몽땅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평탄하기만 했던 공직생활에 시련이 닥쳐왔다. 민선 2기 내내 겪어야 했던 황망한 사건의 소용돌이는 5년 반이나 계속되었다. 흉흉한 소문과 함께 살생부가 나돌았다.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인물로 내가 지목되었다. 선거에 개입하고 인사에 부정을 저지른 파렴치한 공무원으로 몰려 수사까지 받는 수모를 겪었다. 괴이한 소문의 중심에는 항상 내 이름이 들먹여졌다. 지역 언론으로부터 매질 당하고 중앙부처 특별감사까지 감내해야 했다. 조직적인 괴롭힘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풀어낼 곳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금원산에 올랐다. 계곡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었다. 쏟아지는 물소리에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를 질렀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하염없는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하늘을 담은 호수는 심란해진 마음을 씻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집착에서 벗어나 안온함을 갖게 한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소에 머무를 때 수평의 평온함을 알게 한다. 바람을 가르는 물소리는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일깨운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은 거칠어진 마음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넉넉함을 지녔다. 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늘을 수놓는 구름이 되고 꿈을 좇는 무지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본향에 안착하기까지 낮춤의 삶으로 일관하면서도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다. 스스로 낮아지는 겸양의 미덕과 어떤 상황에서도 본성을 잃지 않는 강인함까지 지녔다.
일행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계곡물에 환한 웃음을 보낸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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