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이양서원에서 청백리를 만나다.

비슬신문 2022. 10. 2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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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서원에서 청백리를 만나다.

-곽안방 선생을 찾아서-

 

청백리제도는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비자금 문제 등이 매스컴을 통해 터져 나올 때마다 청렴·결백하게 공직생활을 할 수 없을까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지역에 청백리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조 때 청백리로 선정된 곽안방선생이다.

이양서원(尼陽書院)은 선생의 청백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중서원이다.

현풍 IC를 빠져나와 구지 국가산업단지 쪽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보이는 산이 대니산, 좌측에 보이는 산이 용두산이다. 대니산은 니구산(尼丘山)의 기를 받고 태어난 공자를 받든다는 뜻을 지니는데 이양서원은 이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1707(숙종 33)에 사당인 청백사를 건립하여 곽안방과 곽지운을 배향하다 1786~1871년 서원으로 발전했다. 이후 곽규, 곽황을 추가 배향해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렸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외삼문, 관리사만 남고 모두 훼철되었다. 1945년 사당을 복원하고, 1982년에 동·서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인데 이곳 이앙서원은 동묘서학(東廟西學)의 건물배치로 동쪽에 사당, 서쪽에 강당을 두고 있다. 도동서원에 배향된 김굉필 선생과 함께 대구의 대표적인 불천위 인물로 향사는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에 지낸다. 출입문인 준도문(遵道門)은 도를 따른다는 의미이고, 출입문의 문루인 읍청루는 강당인 경렴당, 사당인 청백사와 같이 선생의 청백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맑고 탁월하였으며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사귀었다. 세종 때 해남현감으로 지낼 때 선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살아있을 때 받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 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되었다.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이시애가 선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토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사를 깨끗이 하여 청백리에 뽑혔으니 당대 최고의 영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청렴결백했던 삶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날과 다르지 않듯이 벼슬을 그만둘 시기가 되면 사익을 챙기기 바쁜데 선생은 사익(私益)을 전혀 챙기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가 지닌 것은 봇짐 하나에 말 한 필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하인이 허리춤에 자그마한 자물쇠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본 선생은 비록 하찮은 열쇠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인데 가져온다는 것은 나를 더럽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고 했다. ‘현어는 관공서에서 선물 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의 청렴함을 비유한다.

 

 

선생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5대조로 부인은 이조 정랑을 지낸 송포(宋褒)의 딸 김해 송씨이다. 곽승양, 곽승화, 곽승문 세 아들을 두었다. 둘째 아들인 곽승화는 배신, 곽율, 원개와 더불어 도동서원의 별사에 배향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

 

조선 후기 어사 박문수는 영남지방에서 하회마을 다음으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솔례라고 했다. 이 솔례마을의 입향조가 곽안방선생이다.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를 잘 따르는 사람,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마을 이름을 솔례率禮라고 지었다.

마을 초입에 용흥지라는 큰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주변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등이 작은 숲을 이룬다. 이 숲에 곽씨 문중의 문훈(門訓)이라고 할까,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충과 효를 가업으로 삼고, 청렴결백으로 가문의 명성이 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곽안방 선생이 생전에 삶의 철학으로 삼고 평생 실천한 덕목으로 후손들도 그리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달성군이 개청 100주년을 맞아 달성의 뿌리를 찾고 지역민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달성을 빛낸 인물 27명을 선정했는데 선생도 그 중에 한 분이시다. 달성종합스포츠파크 내에 있는 역사 인물 동산에 가면 곽안방 선생을 흉상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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