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주옹(春秋主翁) 수봉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인흥마을에 목화 꽃 피다.
남평문씨세거지에 당대의 문인들이 찾아오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 그 앞으로 개울물이 졸졸졸 흐른다. 신천이 대구의 심장이라면 천내천은 달성군 화원읍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아파트를 비집고 한갓진 곳으로 차머리를 돌려 천내천을 끼고 남동쪽으로 달리다보면 얌전하게 산자락에 기댄 기와집들을 만나게 된다. 남평문씨세거지(달성군 화원읍 인흥마을)다.
세거지 뒷산은 대구를 남서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비슬산의 지맥인 천수봉이다. 그리 높지 않아 넉넉하고 후덕한 느낌을 주며, 안산(案山)인 함박산은 벼슬하는 귀인이 나타난다는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인흥사의 절터였다. 남평 문 씨의 중시조인 삼우당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仁山齋 文敬鎬 1812-1874)선생이 1840년 전후 이곳을 구획·정리하여 집을 지으면서 세거지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인산재 선생이 터 잡기 전까지 이곳은 빈터였다. 문필봉(文筆峰)이 있었다면 오래도록 빈터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양택에 문필봉이 없으면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음택에서 보강한다고 한다. 이곳 문 씨는 500년 전인 14대조 묘에서 바로 윗대의 묘까지 하나도 산실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을 진입로는 북서쪽으로 나 있다. 마을에서 보면 지금은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 낙동강이 흐른다. 옛 사람들은 마을의 좋은 기운이 낙동강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나보다. 그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수구막이 용도로 2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몇 그루만 남아있다. 이 소나무는 앞서 말한 수구막이 용도뿐만 아니라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는 역할까지 했다. 마을의 담장이 다른 곳에 비해 높은 것도 외부와의 차단이 아니라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입구 논머리에는 돌을 쌓아 만든 조산무더기가 있다. 이것은 좌청룡, 우백호에서 산천의 부족한 부분인 백호를 보강하기 위한 비보적인 역할로 쌓았는데 마을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위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이 마을의 주된 건물로는 수백당, 광거당, 인수문고가 있으며 그 외에도 중곡서고와 거경서사가 있다.
수백당은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당초에는 수봉정사라는 편액을 걸었다가 수백당으로 교체되었다. 이 건물은 수봉 문영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36년 논 100마지기 값으로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 건립했다. 4칸의 미닫이 방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사람이 묵어갈 수 있으며, 미닫이를 다 열면 60명은 족히 앉아 모임이나 세미나를 할 수 있다. 앞마당 정원에는 석가산을 만들어 소나무와 전나무를 심었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고 빛나는 정원이라는 뜻의‘이광원(彛光園)’이란 석주(石柱)를 세웠다. 대문과 마당에서 거북문양을 볼 수 있는데 이때의 거북은 도동서원의 거북과 달리 무병장수를 뜻한다. 수백당은 우당 유창환 글씨이고 수봉정사의 현판은 위창 오세창, 쾌할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다.
남평문씨 세거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건물이 광거당이다.‘광거’는 대장부로서 가야 할 길인 居天下之廣居(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 立天下之正位(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서), 行天下之大道 (천하의 큰 길을 간다)라고 밝힌 맹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1834년 세거지에 최초로 건립한 건물인 용호재가 있던 곳으로 1910년에 지은 건물이다. 대문을 열면 낮은 기와 토담이 앞을 가로 막는데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아 헛담이라고 하며 안채와 바깥채를 분리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안채의 품격을 유지 시키니 기능이 없는 것이 아니다.
1910년에 건립한 광거당은 문화공간이자 접객 장소로 일제가 세운 신식학교에 자제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문중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는 사립학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만권당을 설립하여 도서관 역할까지 했다. 만권당의 전수규약으로 충, 효, 우애, 신의를 교육하고 손님을 대할 때는 예와 경으로 대하고, 책을 함부로 빌려주지 말고, 여름에 책을 해바라기시키고, 공부하러 오는 자제들에게 지필묵을 주라는 것들이 전해진다.
광거당 누마루 앞 처마에는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이 있는 집이라는 뜻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舘)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인수문고는 1967년에 지은 문중문고다. 광거당과 수백당에 소장된 만여 권의 전적과 고서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6.25때 손실이 있어서 별도의 건물을 지어 두 곳에 있던 책을 수장하고 있다.
전국 문중문고 중 7,000여 책 2만권이 넘는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서적들은 수봉선생이 국내는 물론 중국에 사람을 보내 구입한 책들이다. 책을 선별해준 사람은 창강 김택영 선생이다.
인수문고뿐만 아니라 문태갑 선생이 조상의 정신을 잇고자 1993년에 설립한 중곡문고와 책을 열람하고 토론하는 공간인 거경서사가 인수문고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문 씨 세거지는 대구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 씨 종가와 함께 국가에서 관리하는 세거지다. 이곳에 유월이면 토담과 어우러진 능소화로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오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앞에 조성된 연못인 인흥원에 연꽃이 필 때나 솜털 같은 목화가 하얗게 벌어지는 이즈음이면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수봉 문영박(1880~1930) 선생은 어떤 분일까?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이다. 호는 뒷산 천수봉에서 차용했으며 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광거당을 세우고 그 내부에 만권당을 설치했다. 국내서적뿐만 아니라 많은 책들을 중국으로부터 수집했으며 당대의 문인들을 초청하여‘남평문씨세거지’를 전국에 홍보한 분이다.
선생은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냈다가 발각되는 사건인 파리장서사건으로 투옥된 유림들을 위해 거금을 내놓는다. 선생의 사후, 상해 임시정부에서‘追弔 大韓國 春秋主翁 文章之 先生之 靈 대한민국임시정부일동’이라는 조문을 보냈다.
조문에 나온 ‘춘추주옹’은 역사의 주인이 되는 분이라는 뜻의 존칭이고 문장지는 수봉선생의 字이다. 이런 존칭은 임정활동이나 광복운동에 많은 기여와 공헌을 했다고 해도 쉽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수봉선생의 인물됨과 인품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조문은 창원 출신인 이교재 선생이 국내로 가져왔는데 전달하기 전에 체포되었고, 해방 후, 그의 자손들이 집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정부 수립 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달성을 빛낸 위인으로 현풍읍 스포츠파크 내 인물 동산에 흉상이 제막되어 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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