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
서당골의 낙교재(洛橋齋)를 찾아서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다.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 그보다 약간 낮은 단계의 관학으로 사부학당이 있으며, 향교와 서원, 서당은 지방교육기관이다. 관학인 향교나 사학인 서원은 남아 있는 곳이 그나마 많은 편이지만 초등사립교육기관인 서당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일정한 조건이나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설립되었기 때문이다서당은 초등학교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그에 비해 훨씬 작았다. 유학이 중요시되면서 마을에서 선생님을 데려와 차리기도 하고, 몰락한 양반유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렸기 때문이다.
관내에 서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어 찾았다. 옥포읍 교항리에 있는 ‘낙교재(洛橋齋)’다. 낙교서당(洛橋書堂)으로도 일컬어지는 낙교재는 야헌(野軒) 김성노(金成魯)(1769~1831)선생이 1812년에 세운 사립학교다. 낙교(洛橋)는 ‘낙동강 다리목 마을‘을 의미한다. 다리목은 43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큰 다리가 놓여있었다고 ‘다리목’이라 하였고, 오늘날에는 다리 교(橋)와 목 항(項)을 써서 ‘교항리’라 부른다.
선생은 1769년(영조 45) 옥포읍 교항리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에서 분파한 청도 김씨의 시조인 고려시대 10대 문인 중 한 명인 김지대의 27세손으로 교항리 다리목 마을 입향조인 김유원(金有元) 공의 10세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 때문에 몸을 상함이 예도를 넘었다. 상복을 입은 6년 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에는 발길을 돌렸으며, 장례나 제사의 절차는 주자가례를 준수하고 임금이나 왕후의 제삿날에는 3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거친 음식만 먹었다. 왕실의 초상에는 소박한 식사에 잠은 밖에서 자면서 쇠약하고 늙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선생은 선비가 되고자 대구 연암산 자락의 서용담(徐龍潭)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학문을 갈고 닦은 선생은 향시에 누차 합격한 후 후진 양성에 뜻을 두고 금계산 아래에 낙교재를 지어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마을 풍습이 날로 새롭게 변해가고 선생에게서 수학한 문하생이 진사 시험에 급제하는 등 유명세를 타자, 소문을 듣고 배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100여 명이나 되었다. 다시 동쪽으로 조금 더 떨어진 작은 서당골로 이동하였으며 1900년 초에 다리목 마을로 옮겨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야학이 열리다가 6.25 동란 때에는 수백 가구의 마을이 불탔지만 낙교재는 화를 당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규모가 컸지만 여러 차례 옮기면서 규모가 작아졌다. 지금도 금계산 자락을 서당골이라 부르는 것도 서당이 있었던 낙교재에서 연유함이다.
건물은 3칸 건물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4개 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 夾室形)이다. 측면은 한 칸 반 규모의 온돌방에 반 칸의 툇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2칸 규모다. 가구(架構)는 종량(宗樑)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5량가(五樑架)이며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건물 내부에는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대청 후미 벽면 상단에 선생이 처음 후학 양성의 뜻을 세우고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의 ‘야헌(野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입구에는 서당의 이름인 ‘낙교재(洛橋齋)’ 가, 대청 우측에는 통정대부 홍문관(弘文館) 시강(侍講) 김홍락선생이 야헌 선생의 행적을 정리한 ‘야헌기(野軒記)’ 가 걸려있다.
선생이 서당을 낙성하고 읊은 시書堂洛成原韻(서당낙성원운)를 소개하면
經營此屋已多年(경영차옥이다년) 이 집을 경영한 지 여러 해
幸賴諸公心力全(행뇌제공심역전) 다행히 여러분의 전심전력을 힘입었다
但願工夫歸實地(단원공부귀실지) 다만 실지에 돌아가는 공부 바라노니
且將名利付先天(차장명리부선천) 명예와 이로움은 운명에 맡겨라
海客迎來雙杵月(해객영래쌍저월) 바닷가 손님 뜨는 달 맞이하고
山家炊送一絲煙(삼가취송일사연) 산가엔 밥 짓는 한줄기 연기 난다
後昆若得師吾儉(후곤약득사오검) 후손이 나의 검소함을 본받으면
自有家聲世世傳(자유가성세세전) 저절로 집안 명성이 대대로 전해지리라
유적보존회 4대 김정옥 회장(80)은 “선생의 사후 문하생들이 유림계(儒林契)를 조직하여 선생의 학덕을 기렸다. 처음에는 돈을 내 논 2마지기 구입해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재물을 구입해 사용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유림계가 와해되고 종손의 출향과 함께 선생의 관련 흔적들이 유실되고 낙교재 관리도 소홀해졌다. 그 후, 방손 중심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모아 20여 년 전에 ‘야헌처사유적보존회’를 만들고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야헌 처사 청도 김공 유적비(野軒 處士 淸道 金公 遺蹟碑)’를 건립하여 현창하고 관리하고 있으며 이를 정신적 상징물로 삼아 매년 음력 3월 10일 낙교재 비석 앞에서 향사를 지낸다”고 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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