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임하초당 위에 세워진 금암서원(琴巖書院)

비슬신문 2023. 6. 2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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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초당 위에 세워진 금암서원(琴巖書院)

대구지역 성리학의 시작,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

임하 선생, 임난(壬亂) 대구 초대 의병장으로 팔공산 창의를 이끌어

 

낙동강이 죽곡산을 휘감아 돌아가는 다사읍 연화(烟花)산 연화리에 금암서원(琴巖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의 성리학이 낙동강 물길따라 금암서원에 이르러 대구 성리학의 원류인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3)을 만나는 공간이다.

 

대구지역 성리학의 시작

16세기 대구지역 성리학은 임하 정사철, 계동 전경창, 송담 채응린 등 세분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계동 전경창(全慶昌) 선생은 파동출신으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학맥을 계승해 대구에 전파한 유일한 분이다. 1532년생인 계동선생은 1555년에 사마시에 했으며, 비교적 늦은 나이인 42세 문과에 급제했다. 전경창은 임하 선생이 건립한 연화재를 출입하며 강학과 후학을 양성했다.

송담 채응린(蔡應麟) 선생은 동구 미대동 세거에서 출생해 27세 사마시를 합격했다. 3살 어린 전경창을 스승으로 모시며 퇴계 학문을 익혔으며, 금호강 가에 소유정과 압로정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금암서당(금암서원)

초당 위에 세워진 금암서원

금암서원은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연화산 자락에 있는 서원이다. 감여가가 팔공산 맥간의 마지막 결연지소라고 일컷는 연화산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으로 물안개로 인해 꽃과 산이 연기에 둘러쌓인 모습이라고 하여 연화산이라고 하며 산아래 마을은 연화리이다.

임하 선생은 25세 봄, 팔거의 사수에 서실을 지었고, 26세 봄, 연화산 선친 어모공(휘 세검)의 묘소 아래 분암인 연화재를 짓고 이때부터 성리학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으며, 전경창과 채응림 등 많은 우인(友人)들이 방문해 강학했다. 39세엔 모부인인 타계하자 여묘(廬墓)하였으며, 여묘가 끝난 후 거주지를 동곡에서 연화산으로 옮겼다. 이때, 초당을 짓고 이름을 임하초당으로고 편액하고 강학했다. 이때부터 임하라는 호를 사용했다.

57(1586) 봄에는 임하초당 맞은편 경치가 빼어난 낙동강변 아금암(牙琴巖)에 아금정(牙琴亭)을 짓고 이사했다. 1년 후 마천산 자락에 폐사된 선사암에 선사서사를 짓고 강학했는데, 이때 향리의 많은 수재(秀才)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임하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후학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강학 장소를 마련하고 후학 양성에 노력한 점일 것이다.

선생이 작고 후 171년 후인 1764년 당시 대구지역 사림들이 뜻을 모아 임하초당 있던 자리에 금암사를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1779년 낙애 선생을 종향하고 1986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서원은 헐려지고 유허비가 세워졌다. 1958년 후손들이 지금의 금암서당을 세웠다. 매년 음력 1012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금암서당은 정면 5,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으로 평면 구성은 왼쪽으로부터 온돌방 2, 2통문의 대청, 온돌방 1칸 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대청 통문을 통해 임하 선생과 낙애 선생의 묘를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대량(大樑)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한 원기둥 1()을 대량 하부에 받쳐 놓았다. 상부 구조는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梯形板臺 )을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임하 선생 유허비와 '임하 선생 낙애 선생 양 임란 창의비'

임하 정사철의 생애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3) 선생은 지금의 하빈면 동곡(桐谷)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어모장군 정세검(鄭世儉)이고 모친은 진산진씨이다. 어려서 부친께서 타계하여 모친의 엄한 가르침을 받았다. 7세 때 처음으로 효경(孝經)을 배웠고, 8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10세 때 소학을 배웠고, 15세 때 소학내편을 직접 필사하였다. 23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며, 1570(선조 3) 41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30세 때, 처음 강학을 시작했으며, 정여강, 곽재겸, 손처눌, 서사원 등 후학을 양성했다. 1571년 가을, 13세 아래인 한강 정구(鄭逑) 선생이 임하초당(林下草堂)을 찾았을 땐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임하정사철묘소

58(1587년 선조 20)에 남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3(1592년 선조 25) 그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6일에 팔공산 부인사에서 지역의 인사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지역 전역에 의병을 모아 공산의진군을 결성하였다. 이때 임하 선생은 초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전란 발발 무렵 대구 유림의 최고 지도자는 임하 선생이였다. 대구 유림을 대표한 임하 선생, 계동 선생(全慶昌, 1532~1583), 송담(蔡應麟, 1529~1584) 선생 중 1592년에는 임하 선생만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종환(腫患)으로 인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낙재 서사원이 대신하였다. 공산의진군은 각 지역에서 전투에 임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부득이 고령으로 피난했다. 1593(선조 26) 봄에 거창으로 피신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그해 314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임하 선생은 타계한 지 171년 후 1764(영조 40)에 묘소가 있는 연화산 아래 금암사를 건립하여 제향되었다.

낙애정광천의묘비와술회가비석

낙애 정광천의 생애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송파(松坡)이다. 임하 선생의 장남으로 일찍이 문자를 깨치고 말씨가 뛰어나 사람들이 기동(奇童)이라고 칭찬했다. 자라서는 격식이 맑고 우아했으며, 시문을 잘 지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도와 공산의진군이 조직하였으며, 달성군 하빈현 남면(南面)[현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부친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낙강(洛江) 동쪽기슭(낙지동애洛池東愛)에 터를 잡았다는 기록에서 부친이 터 잡은 곳을 호(낙애) 사용했음이 짐작돼 낙애 선생의 지극한 효()를 짐작한다.

낙애 선생은 40세가 되는 1592년 총 9수 시조를 지었다. 15921111술회(述懷)6수와 15921220병중술회가(病中述懷歌)3수이다. 술회는 임진왜란으로 왜적들에게 유린된 고국을 수복하고자 하는 염원과 임금[선조]의 안위를 걱정하고, 늙은 부친[정사철]을 보전하려는 충성심과 효심이 잘 드러나 있다. 낙애 선생 시비는 금암서당 뒤편에 있는 묘소 옆에 세워져 있다. 비의 전면에는 낙애시비(洛涯詩碑)’라고, 뒷면에는 술회의 두 번째 작품이 새겨져 있다.

 

설울사 설운지고 민망(悶罔)함이 그지 업다

병진(兵塵)이 막막하니 갈 길이 아득하다

어느제 수복 고국(收復故國)하야 군부(君父) 편케 하려뇨.

 

낙애 선생은 부친이 거창에서 타계한 뒤 이듬해 병사했다. 그는 낙애일기'31책의 낙애집(洛涯集)를 남긴 채 부친과 함께 금암서원에 배향됐다.

400여년만에 마주한 임하 정사철, 낙애 정광천의 친필 만사

 

400여 년만에 마주한 임하 선생과 낙애 선생

 

맑고 화창한 날씨였던 527, 아름다운 금계화 꽃들이 피어있는 연화리 금암서당을 방문했다. 이날 임하문중 정경현 회장과 정만호, 정재특 고문, 정재명 총무, 그리고 정주현 재무가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대구광역시향교재단 정재특 이사장은 매년 향교에서는 전국한시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임하 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금암서당에 임하 선생의 공덕을 표현한 한시 두편을 족자와 편액으로 전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임하문중은 대구지역 성리학 1세대로 대구 정신문화의 시초는 임하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한강학파의 한강 정구 선생의 영향으로, 그 전 세대인 임하, 계동, 송담의 공덕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서당 한켠에 있던 빛바랜 한지를 감싼 액자를 정만호 고문이 조심스레 들고 나왔다. 임하 선생과 낙애 선생의 친필이라고 했다. 정 고문은 얼마 전 칠삼공 집안 정여해 어른의 무덤을 이장하는 중 임하 선생과 낙애 선생의 친필인 만사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정여해는 임하 선생의 큰 집 조카로 일찍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그 슬픔을 만사로 남겼다. 400여 년만에 임하 선생의 존재를 마주한 그 순간은 감회가 깊었다. 서당의 대청 앞에서 횃불을 밝혀 강학하던 정모대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전국한시백일장장원작품_임하선생의공덕기린

임하 선생 묘에 오르기 전에, 임하초당 터를 먼저 찾았다. 금암서당과 임하초당 터, 임하문중 선영 중간에는 임하 선생 유허비와 '임하 선생 낙애 선생 양 임란 창의비'가 위치하고 있다. 그 뒤로는 빼곡한 대나무 숲을 지나 넓은 집터가 우리를 맞았다. 정경현 회장은 "이곳은 임하 초당이 있던 곳으로 금암서원이 있던 자리이다."라고 설명했다. 넓은 집터와 돌담, 맑은 물이 흐르는 우물은 그 과거 선비들의 기품있는 강학하던 임하초당의 떠올랐다.

임하초당터에 있는 우물

임하초당 터를 마주보는 산 자락에는 작은 토담으로 둘러싸인 비석이 하나 있었다. 매판소(埋板所)로 알려진 작은 비석은 훼철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정재명 총무는 "비 아래에 묻혀있던 금암서원현판을 현재 유허비 아래에 묻고, 그 위에 비석을 세웠다"고 했다.

연화산 가운데 위치한 임하문중 선영엔 임하 선생과 낙애 선생의 묘가 있다. 임하 선생의 묘엔 특이하게 400여 년 풍파를 견딘 묘비와 다르게 비두(碑頭)는 설치한 지 얼마되지 않는 것 같다.

정주현 재무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임하 선생의 비두가 도둑맞아 없어졌을 때, 문중에서 새로운 비두를 제작하였다"라고 했다.

금암서원현판을묻었다고전해지는매판소비석

금호선유문화와 임하 선생

최근 사단법인 금호선유문화연구보존회에서 대구시와 달성군과 함께 선유문화를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금호선유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선유문화의 역사는 130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 신라왕의 뱃놀이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선유와 문학이 선비의 풍유와 함께 발전되어 금호강 르네상스를 맞은 것은 서당과 서원의 강학과 수학의 장이 되고 낙동강과 금호강을 따라 누정이 건립되던 16세기를 맞이하면서이다.

임하 선생은 1561716(기망旣望)에 대구지역 여러 제현과 더불어 금호강 선사에서 낙동강 아금암까지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랜된 대구지역 선유의 발자취로 임하 선생은 금호강 선유문학의 기원이 된다.

또한, 60세가 되던 1589년 선사서당에서 아들 정광천, 손처약 등 대구지역 제현과 선사서당 지암에서 뱃놀이를 했다. 아래는 임하 선생의 시이다.

 

취한 속에 또 그대들을 만나니

도리어 해가 서쪽으로 저물려하는 것을 잊었노라.

분명히 하늘 위에는 밝은 달이 떠 있으니

응당히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취리라.

 

 

공산의진군

대장 : 정사철, 서사원

공사원(工事員) : 이주

유사(有司) : 이경원, 채선행

읍내: 용덕리 (항병장)하자호 / (유사) 주심언

수성현: 대장겸 현내장(縣內將) 손처눌 / 유사 손탁

해안현: 오면(五面) 도대장(都大將) 곽재겸

하빈현: 대장 겸 서면장 이종문 / 유사 정악

남면 (항병장) 정광천 / (유사) 곽대덕

동면 홍한 / 정용, 북면 박충윤 / 이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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