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마후라’ 영화를 아시나요?
하늘을 나는 도깨비, 유치곤 장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우리나라다. 6·25 전쟁 발발 73주년을 앞두고 2005년 개관한 유가읍 양리에 위치한 유치곤 호국기념관(이하.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에 기념관이 들어선 것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유치곤 장군이 이웃 마을인 쌍계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기념관은 대대적인 재공사를 앞두고 있어 안으로의 입장이 어려웠지만, 기념관 마당에는 공군을 상징하는 전투기로 T-37C 훈련기, 1960년대 한국공군에 도입된 최초의 공대지 유도탄인 AGM-12, F-86F 전투기, 전쟁에 참여한 16개국 국기, 장군의 추모비와 유용석의 추모비가 있으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빨간 마후라’노래비가 있다.
장군은 (1927~1965)은 유가읍 쌍계리에서 태어나 44년 일본 육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49년 공군에 입대해 6·25가 발발한 이듬해인 51년에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1952년 유엔 공군은 후방지역의 적 병참선을 차단할 목적으로 스트랭글 작전을 개시하였고, 이 작전의 일환으로 승호리 철교를 폭파해야 했다. 이 철교는 평양 동쪽 16km에 위치한 대동강 횡단 철교로 평양과 덕천 사이의 평덕선과 평양과 원산 사이의 평원선이 지나는 교량이었다. 인민군이 이 교량을 통하여 전선으로 병력과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있어 유엔 공군으로서는 이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표적으로 선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 1전투비행단은 옥만화 대위, 유치곤 중위, 박재호 대위와 제 2편대 윤응렬 대위, 정주량 대위, 장성태 대위로 구성된 공군 F-51 무스탕 전투기 6대를 출동시켰다. 조종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4,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하여 450m인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초저공공격방법으로 목표를 공격하여 승호리 철교를 세 동강 내었다.
유엔 공군이 500회를 출격하여서도 파괴하지 못한 철교를 불과 10회 출격으로 교량 절단에 성공하였으니 대한민국 공군의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신화적으로 남을 일이다.
그는 전쟁 기간에 203회의 출격으로 무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3회, 충무공훈장 3회, 미국비행훈장 4회 등을 수상했다. 공군으로서 그는 2,700여 전투비행시간과 공군대학과 국방연구원을 수료한 탁월한 지휘관으로 공군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1965년 과로로 인하여 39세의 일기로 순직하였다.
1964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 장군이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이 노래를 작사한 한운사 선생은 공군을 주제로 한 작품 청탁을 받고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군의 완강한 요청으로 마지못해 관련된 인물을 추천해 주면 그들과 면담해 자신감이 생기면 쓰겠다고 조건부 승낙을 하였다. 이때 추천받은 사람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호랑이 강호륜, 산돼지 유치곤 등의 보라매이었다.
작가가 유치곤 대령을 처음 대면하던 날은 구름이 짙게 끼어 장대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악천후였다. 그럼에도 대령은 자기가 조종하는 T-33 훈련기에 한운사 선생이 동승해 주길 원했다. 선생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쳤고, 비행은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로 취소되었다. 이때 유대령의 품성과 언행을 보고 작품 속의 주인공 성격과 육체적인 조건을 구상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기념관 마당에 유치곤 장군 이외에 유용석 소령의 추모비가 있다. 유 소령은 유치곤 장군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대륜고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78년 공군사관학교 26기로 졸업과 동시에 공군 소위에 임관되어 비행조종 교육을 20개월 동안 강도 높게 받고 자랑스러운 조종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2년 제주 상공에서 C-123조종사 훈련 도중 순직하였다.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 건립을 제안한 이는 현삼조(90. 달성군 유가읍 금리)씨다.
2020년에 만났을 때 현씨는 “장군은 형의 친구이자 고향 선배를 위해 5천만 원이면 동상을 건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당시 군수를 찾아가 의논했다. 군수는 동상이 아니라 규모를 크게 해보라는 말을 했고 그래서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자료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고 그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전쟁기념 사업회는 2000년, 유치곤 장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새천년 첫 번째 호국 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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