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목판본을 제작한 추적선생의 흔적을 찾아
인흥서원을 가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한 분이 안중근 의사다. 이 글귀는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명심보감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송에 이르기까지 역사, 문학, 철학부터 정치, 사회를 움직인 주요 인물과 그들에 얽힌 사건들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고전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편집하여 어린이들의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대표적인 한문 습자교본인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과 함께 교육하는 기초 과정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명심보감을 저술한 분이 추계 추씨의 시조인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17)선생이다. 선생을 배향하는 인흥서원은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세거지와 마주하는 인흥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선생의 연고지인 장지(葬地)가 있기 때문이다.
서원은 1863년(철종4년)에 사당을 세우고, 고종원년인 그 이듬해에 신도비를 세웠다. 1866년(고종3년)에 유림들과 추적의 20대 손으로 대구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심보감판본을 편찬한 추세문에 의해 지어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고 1938년에 추교석의 추진으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인 숭봉문을 열고 들어가면 강당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강당의 이름이 있는 것과 달리 인흥서원이란 현판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데 현판은 응와 이원조(1792~1871) 선생이 쓴 글씨로 노당(露堂)과 세심당(洗心堂)의 부조묘에 고유문을 쓴 분이다.
강당은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들의 회합과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의 좌우로 온돌방이 있으며 건물 좌우로 여느 서원과 다름없이 동재인 관수란(觀水欄), 서재인 요산료(樂山寮)가 있다.
관수란(觀水欄)은 『맹자』의 「진심장」에
‘관수유술(觀水有術 물을 보는 방법이 있으니)
필관기란(必觀基瀾 반드시 그 물결을 볼 것이며)
일월유명(日月有明 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용광(容光 빛을 용납하는 곳에)
필조언( 必照焉 반드시 비추어 준다)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재인 요산료(樂山寮)는 『논어』의 「옹야」편에서
지자낙수(智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에서 따 왔다
사당은 서원의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내삼문인 추모문(追慕門)을 열고 들어가면 4분의 위패를 모셔 제향하고 있는 문현사(文顯祠)가 나타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처마는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첫 인물이 추적선생의 아버지인 회암(悔庵) 문정공(文正公) 추황(秋篁. 1198~1259)선생이다. 12살(1209년)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험(成均試驗)에 장원하였고, 1213년 문과 급제 후 직제학예부상서 예문관 대제학 문회시중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으로 이해와 명분 사이에 구차한 뜻이 없었고 항상 담소자약(談笑自若)으로 근심이나 놀라운 일을 당하였을 때도 보통 때와 같이 웃고 이야기하였다. 무신집권기였으나 최우의 명유우대정책(名儒優待政策)으로 학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두 번째로 배향되고 있는 분이 추계추씨(秋溪 秋氏)의 시조로 불리는 노당(露堂) 추적선생이다. 충렬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랏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현재 충남 당진군 합덕읍인 합덕부곡(合德部曲)을 현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그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지만 뒤에 풀려나 북계 용주의 수령을 맡았다.
충렬왕 말년에 문묘에 배향된 안향(安珦)에 의해 발탁되어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며 한문교양서인 『명심보감』 목판본을 편찬하여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성격과 도량이 크고 활달하며 행동에 억제를 받거나 방종하지 않았다. 늙어서도 식사를 잘 하였는데 항상 손님을 대접할 때는 흰쌀밥에 생선을 잘라 국 끓이면 그만이다. 만족할 줄을 알아 항상 만족한다면 종신토록 욕되지 않을 것이고 그칠 줄 알아 항상 적당함에서 그친다면 종신토록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명심보감의 〈安分篇〉에 나오는 말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죽계 안유선생에게 수학했으며 그 성취는 『역옹패설』을 쓴 이제현 선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국가가 병기만 사용해서 20년 세월을 지내왔기에 육경(六經)의 학문이 겨우 끊이지 않고 실오라기처럼 전해왔다.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정승이 되었을 때 나라에 학자들을 모이게 하여 학당을 지은 다음 이성(李晟)과 추적(秋適), 최원충(崔元冲) 등을 천거하여 한 가지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곳에 교수 두 명을 두게 하니 이때부터 높은 관직에 잇는 사람들이 경학에 능통하고 고문을 넓게 공부하는데 주력했다”고 하였다.
선생은 1304년 왕의 명령으로 송도(현. 개성)에 성균관인 대성전을 세우고 경리교수(經理敎授)를 지냈다.
세 번째로 노당선생의 손자로 운심재(雲心齋) 추유(秋濡. 1343~1404)을 들 수 있다. 1363년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공민왕 때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고 명나라 창업(創業) 공신에 동참되었으며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모신 분이 운심재공(雲心齋公)의 5세손인 세심당(洗心堂) 추수경(秋水鏡. 1530~1600)선생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중국 오현군(五賢郡)출신으로 1591년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을 따라 부장(副將)으로 아들 노(蘆), 적(荻)을 데리고 원병의 일환으로 환국하였다. 조선에 와서 곽산, 동래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주에서 살았다.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됨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았다. 부여의 충현사(忠賢祠) 등에 제향 되었다.
인흥서원 창건기(仁興書院 創建記)를 보면
‘서원 주위는 큰 산이 둘러있고 시냇물이 흐르며 중간에는 깊숙이 명구가 전개되어 있어서 주민들의 풍속도 순박하고 후하며 벼와 오곡도 무성하여 인자(仁者)들이 은둔생활하고 배회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도은 이숭인 선생과 한강 정구선생도 여기에서 지내며 노당 선생의 발자취를 이은 것도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노당선생이 쓴 명심보감은 계선편, 천명편, 효행편을 비롯하여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유명한 좌우명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사람을 믿고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의인막용 용인물의 擬人莫用 用人勿疑)’이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고 한 안중근 선생의 말도 명심보감에서 비롯된 말이다.
참고문헌
대구지역 서원 현황조사결과 보고 자료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교육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산 곽화순 선생 고희를 전후하여 한시를 공부하다!! (0) | 2023.10.01 |
---|---|
동편제 수궁가 김선화 명창, 전통동편제 수궁가 완창 뮤지컬 공연 (0) | 2023.10.01 |
▸ 2023. 7. 21.(금) ~ 10. 29.(일) 대구방짜유기박물관 무료 관람 (0) | 2023.08.26 |
제 10회 달성군수기 생활체조 대회가 열리다. (0) | 2023.08.20 |
국립대구과학관 제3회 과학영상콘텐츠 공모전 개최 (0) | 202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