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대구에서 가장 많은 유명악 판관 선정비를 찾아서

비슬신문 2024. 2. 1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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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은 후세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대구에서 가장 많은 유명악 판관 선정비를 찾아서

 

세한도로 유명한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며 금석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금석문 연구를 통해서 북한산 순수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속이나 돌 등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을 뜻하며 이를 연구하는 학자를 금석학자라고 말한다. 금석문은 대부분 돌에 새겨져 있는데 우리 지역에도 돌에 새겨진 비가 적지 않다. 이번 지면에서는 돌에 새겨진 선정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선정비는 거사비(去思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송덕비(頌德碑), 선정애민비(善政愛民碑), 청덕비(淸德碑), 위국애민비(爲國惠民碑)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는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판관, 관찰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들 중에는 지방관이 임지를 떠날 때 관행으로 세운 비도 없지 않지만 한 사람의 비가 한두 기도 아니고 무려 13기가 있다는 것은 결코 관행으로 세운 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주인공이 대구판관 유명악이다.

현재 그의 비는 경북대학교 4, 경상감영공원 1, 화원읍에 8기가 남아있다. 화원읍에 소재하는 것들은 1993년 달성군이 화원읍과 달서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데 모은 것이다.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유명악 선정비

 

유명악(1667~1718)은 서울 한정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를, 7세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1705, 생원시에 합격하여 개령현감을 거쳐 1713년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3년간 재임하였다.

부임하던 해 가뭄이 극심했는데 그가 부임하자마자 큰 비가 내려 하늘이 보내준 사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는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게 되자 창고의 문을 열어 굶주림을 면하게 했고, 조세와 부역을 감해 명판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구지역 33개의 마을 주민들이 각각 송덕비를 세웠으니 그의 선정을 알만하다.

그는 대구판관으로 재임 중이던 1714, 현 중구 남산교회 북편에 석빙고를 건축했다. 그 전까지는 두꺼운 초가로 지하창고를 덮고 3년마다 부민들로부터 짚을 거두어 교체했는데 돌을 이용해 높이 3, 길이 10칸이나 되는 규모로 개축하며 부민에게 일절 경비를 부담시키지 않고 경상감영의 지원을 받았다고 전한다.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있는 석빙고 비문에 따르면 현재 청도에 있는 석빙고와 같은 모습인 반월형 무지개 형식으로 9단이라고 나와 있다. 이 석빙고는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같이 사라지고 석빙고 중수비는 옛 대구측후소(중구 남산동)에 보관되고 있다가 1973년 경북대로 옮겼다.

1716년 순흥부사로 이임하였으며, 1718년 청주목사로 재임하던 중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은 영의정과 대구 관찰사를 2번이나 지낸 유척기(俞拓基)로 그의 선정비 또한 아버지와 나란히 경상감영공원에 있다.

 

유명악 선정비뿐만 아니라 달성군 청사 내에도 42기의 선정비가 있다.

이 비석들은 본래 현풍 성하리에 소재한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있던 것들이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 공사 때 성하리 구쌍산 일대에 남아 있던 비석들과 옛 관아 입구인 현풍면사무소 도로변 비석거리에 남아있던 비석들 총 38기를 속칭 공들고개라 불리는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모아두었던 것을 20167월경에 달성군청내로 옮긴 것이다.

달성군청사 내 선정비

 

민선 8기 군정 슬로건은 군민이 빛나는 달성이다. 군민이 빛난다는 것은 군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겠다는 말이고, 살기 좋은 군민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관찰사, 판관들처럼 군정을 펼치겠다는 의미다.

2024, 푸른 용이 꿈틀거리는 청룡의 해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용은 신성한 동물로 힘과 용맹, 지혜를 상징한다. 청룡은 오행에서 붉은 해가 힘차게 솟는 동쪽을 의미하며 생명을 다스리는 봄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성의 밝은 내일이 열리고 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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