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반전 -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그는 임진왜란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한 시대의 영웅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해 침략국인 일본을 패퇴시킨 국제 전쟁이었다. 조선 중기인 1592~1598년(선조 25)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는데, 임진년에 처음 발발했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부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후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이순신 장군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는데, 이는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전승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해군사관학교 교재에도 실려 있을 만큼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은 1592년 5월 1차 출전(옥포해전)에서 무려 40척의 왜선을 격침시켰다. 조선군이 거둔 사실상의 첫 번째 승리였다. 조선 수군이 2차로 출전한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출동했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정보전에 휘말려 고초를 당했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일본은 조선 정부에 거짓 정보를 흘렸고,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출동을 명했다.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조정은 그를 파직한 뒤 대신 원균을 임명했다. 1597년 9월 16일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로 돌아와 단 13척의 배를 이끌고 왜선 31척을 격침시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았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 하면 거북선을 떠올릴 만큼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도 거북선이 놓여 있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메쿠라 부네, 즉 소경배(盲船)라고 불렀다. 바깥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배의 눈에 해당하는 것이 보이질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선은 명실공히 조선 최초의 장갑선(겉을 철판으로 덮어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배)이며 조선 수군의 용맹성을 보여준 대표적 전함이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발명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거북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배였다. 신라시대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청해진(淸海鎭, 전남 완도에 있던 군사기지)을 경영하면서 배 위에 방어용 등껍질을 씌운 독특한 전투선을 개발했다. 이 배는 속도가 빠르고 활이나 창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마치 거북선과 흡사했다.
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기록에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모양을 구경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북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거북선 모양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철갑을 씌우고 여러 기능을 보완해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타고 다녔던 거북선도 장군의 막료(幕僚)였던 나대용(羅大用) 군관이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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