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반전】
내시는 모두 남성 상징이 없었다?
궁중 사극의 감초는 내시(內侍)다. 쪼그라진 어깨에 구부정한 허리, 수염 없는 민얼굴에 가늘고 날카로운 눈초리, 가냘픈 체격에 중성적인 비음의 목소리.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내시의 모습이다. 궁중에서는 내시가 되려면 남성 상징을 거세해야 한다. 내시는 늘 왕의 곁에서 궁중의 잡일을 맡아 했기 때문에 왕비, 후궁, 궁녀 등 여자들과 가까이 있을 때가 많았다. 왕비부터 무수리(최하층 궁녀)까지 궁중의 모든 여인은 절대 권력자인 왕의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왕의 예비신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왕이 아닌 다른 남자들이 이를 가까이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게 금지한다고 되는 일인가. 그래서 내시들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남성 기능을 모두 제거했다. 내시는 거세 후 평생 고자라는 수치심을 감추며 살아야 했다.
내시는 남성 상징이 없는 사람이다? 조선의 내시에 관한 한 맞는 얘기다. 조선 내시는 남성 기능을 상실한 환관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내시는 성격이나 신분이 완전히 달랐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별도로 나뉘었고, 고려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성불능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고려 전기 내시는 가문과 학식, 재능과 용모를 갖춘 엘리트 집단이었다. 과거급제나 음서(蔭敍, 조상 덕에 특채로 관직을 받는 것)로 벼슬에 오른 문벌 집안의 아들이나 전장에 나가 군공(軍功)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내시로 발탁됐다. 의종 때 내시는 권문세가의 자제로 구성된 좌번(左番)내시와 유사(儒士)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됐다. 내시는 왕의 근시(近侍)로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 행차 시 동행, 왕명 초안 작성, 국가 기무(機務) 관리, 유교경전 강의, 왕실 재정 담당 등의 일을 했다. 때로는 왕을 대신해 궁궐 밖 민정을 살피는 밀명도 주어졌다.
918년(고려 태조 1)에 내시서기(內侍書記)라는 관직이 있었다. 문종 때는 내시 선발에 대한 기준이 비교적 정확해졌다. 무인정권기 이전에는 대개 문신이 내시에 뽑혔다. 고려 건국부터 무신정변 이전까지 250여 년 동안 110여 명의 내시가 배출됐다. 여진 정벌로 유명한 윤관의 아들 윤언민,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 구재학당을 세운 최충의 손자 최사추,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안향 등이 내시를 지낸 대표적 인물이다.
고려 시대에도 거세자는 있었다. 환관(宦官)·환자(宦者)라 불린 이들은 액정국(掖庭國)에 소속돼 궁중의 잡역을 담당했다. 내시가 엘리트 집단이었던 데 반해, 환관은 대부분 노비, 무녀, 관비 소생, 특수 행정구역인 부곡(部曲) 출신이었다.
내시와 환관은 전혀 다른데도 내시 하면 으레 거세된 남성을 떠올리게 된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 때문이다. 원나라에서는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 같은 현상은 원나라의 사위 나라였던 고려 무신정권기에도 자연스레 전해져 왕의 신임을 받는 환관이 내시로 임명됐다. 이 때문에 내시제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문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에 국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시는 숫자가 늘면서 질이 떨어졌다. 게다가 1356년(공민왕 5)에는 환관의 관청이 새로 설치됐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내시부(內侍府)였다. 이때부터 내시부 소속 환관과 ‘원조’ 내시가 혼동되기 시작했다. 결국 최고 엘리트로 지칭되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으로 둔갑하고 만다.
조선 세종 때 내시가 환관 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고려 내시를 내직(內直)으로 개칭했다. 1466년(세종 12)에는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 소임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忠義衛)와 충찬위(忠贊衛)에 맡겼다. 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환관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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