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벽, 못을 품다

비슬신문 2015. 9. 1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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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을 품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임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방과 거실, 둘이 서 있기에도 거북한 주방과 화장실은 좌변기와 세면대 하나가 전부였다. 바깥세상과 격리해 놓은 감방 같았다. 그것도 부족해 벽으로 갈라놓았다. 단출한 4식구가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온 물건을 둘 공간이 없다 보니 방 하나에 가득 쌓아두어야 했다. 도무지 가재도구를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물건을 꺼내고 나면 방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묵직한 철문을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생각 끝에 벽에다 못을 박아 이것저것 걸기로 했다. 관리소 직원은 다소 난감한 어조로 옆집과 윗집에 양해부터 구하라고 한다. 이사 떡을 돌리며 사정을 말했지만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번의 망치질에도 시멘트 벽면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발력에 의해 망치가 튕겨 나갈 정도다. 방패가 날카로운 창검을 막아내듯 못의 근접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오기가 생겨 못 정수리를 잡고 힘을 주어 망치질을 해본다. 못은 금속성 소리만 낼 뿐 맥없이 구부러진다. 한 개도 박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하자 지켜보던 아내는 서툰 못질이 안타까운지 그만두라고 종용한다. 오기가 발동해 계속 시도해 보지만 거대한 석벽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마와 등에는 연신 식은땀이 흐른다. 짐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친구는 콘크리트 벽에는 시멘트 못이라야 벽을 뚫을 수 있다며 핀잔을 준다.

철물점에서 짧고 굵은, 표면 전체가 은백색으로 빛나는 못 한 통을 샀다. 보기에도 레슬링 선수처럼 다부진 모양이다. 방패라도 능히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 보인다. 친구는 벽에 연한 연필로 일직선을 그은 다음 능숙한 솜씨로 못질한다. , , 탕 못이 벽 속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벽은 하얀 돌가루를 내놓으며 순순히 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세상에는 천적이라는 게 존재한다지만 그렇게 단단한 벽도 짧고 통통한, 볼품없는 시멘트 못에는 사족을 펴지 못했다. 마치 벽과 못이 서로 한몸이 되기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벽 속으로 못이 빨려 들어갔다. 금방 벽과 못이 하나가 된다. 아파트란 낯선 곳에서 타인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함을 내게 미리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고층 아파트로 이사한 후 상태는 더 심각했다. 승강기로 오르내리는 몇 초 동안은 서로가 이방인이 되고 만다. 마치 자대에 배치되는 훈련병의 모습과 흡사하다. 몇 초 동안 무표정한 자세로 그들과 보조를 맞춘다. 미소도 따뜻한 눈빛도 허용되지 않는 절해고도의 공간이다. 처음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벽을 본 기분이다. 승강기 앞에만 서면 안면근육은 작동을 멈춘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가 먼저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목석으로 남는 게 오히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내 몸 한구석에서도 벽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을 줄이야.

이사한 지 1년이 지난 늦은 밤, 못질하는 소리가 연신 귓전에 울려댔다. , , 쾅 울림은 짜증스런 촉수가 머리끝에 똬리를 틀게 했다. 소리의 발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 집과 연접한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싹 수 없는 짓거리를 응징하려고 인터폰을 들다 이내 내려놓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오밤중에 못질할까 싶었다. 아마 그도 벽 앞에서 한없이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전원생활에서 느낄 수 없었던, 폐쇄된 공간에서의 답답함을 못질이라도 해 풀어보고 싶었으리라.

공휴일이 없는 부서라 일상이 바쁘긴 했지만, 이웃과의 벽은 점점 두께를 더했다. 한 번도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벽을 쌓은 것도 못질해댄 것도 바로 나였음에도 오히려 그들에게 냉소만 보냈다. 몸과 마음이 벽처럼 단단해지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었다.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비춰본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무표정한 그림자만 희미하게 남았다. 석양에 아파트의 그림자가 길어지듯 내 마음에도 가늠할 수 없는 긴 벽 하나가 생겨나고 있음을 본다.

거실 벽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달려있다. 그 아래에는 텔레비전과 액자와 달력과 소품이 걸려있다. 무겁다고 내색하거나 내려놓으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답답하게만 보이던 벽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지금껏 벽은 단절의 대명사였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겼다. 벽이 있어야 못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공간에 따라 은폐물과 버팀목이 되고 때론 바람막이가 되기도 한다. 온몸에 상처를 감내하고서도 못과의 공존을 택한 벽이 어느새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왔고 맺어가고 있다. 그중에 기억 속에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쌓은 높은 벽에 좌절하고 때로는 스스로 벽을 쌓아 다가설 수 없도록 막기도 했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 동료에게도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고 마구잡이 못질로 마음에 고통과 시련을 주었다. 그들이 감내할 아픔을 외면한 채진심으로 용서를 빌면서 이젠 작은 못 하나라도 기꺼이 품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벽이 되기로 해본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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