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글날, 한겨레 한맘으로 !

비슬신문 2020. 10. 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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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한겨레 한맘으로 !

 

강성환 대구광역시의원

 

한글날은 1926114일 조선어학회와 신민사(新民社)의 공동주관으로 식도원(요리집)에서 수백 명이 모여 한글반포 480주년을 기념한 것을 계기로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한글날이란 명칭은 1928년부터 사용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으로 한글 반포일이 음력 9월 상한(九月 上澣),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9일로 확인되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한글날을 기념하기 어려웠다. 해방이후부터 109일에 한글날을 기념하였으며, 1949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으로 공휴일로 지정했다.

 

사실, 한글 이전에 우리글이 없었던 건 아니다. i) 고조선 가림토(加臨土), ii) 삼국시대의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 iii) 발해는 자국어로 당나라에 국서(國書)까지 보냈다. 또한, 한반도 주변 만주족, 거란(여진)족에게도 고유문자가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았던 최만리(崔萬理, ?~1445)는 상소문(上疏文)에서 i) 고유문자를 갖은 민족은 야만하고 노예민족이다(故雖至胥吏僕隷之徒). ii) 강대국의 훌륭한 한문을 사용함이 사대정신에도 부합하고 실익이 많다(至誠事大, 一遵華制)며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한글창제를 두고 i)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자들의 창작품이다니, ii) 세종대왕의 비밀프로젝트로 추진했다니 추측을 하고 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세종(世宗)의 상왕(上王)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으로 형제들까지 손보면서 왕권강화에 빈틈이 전혀 없었다. 조정대신들은 목숨 부지에 살얼음판 정국을 걸으면서도 속내는 사사건건 반대하는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처세했다. 특히 허약해 보이는 아들 세종에겐 노골적으로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발목잡기를 했다. 한글창제에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했던 사실을 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백성들 수준에 맞는 글이 없으니 입이 있다고 한들...” 딱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 1428년 진주(珍州)백성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사건을 계기로 백성의 글(訓民正音)’을 만들고자 작심했다. 어느 날 우물쭈물하는 세종에게 저자거리 한 촌로(村老)동네 총각들 사정 다 봐주는 처녀는 똥치밖에 안 된다.”라고 강단을 촉구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하겠다는 각오로 왕자와 공주를 동원하는 가족중심 한글창제 비밀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정인지 등 주동자를 하옥시켜도 멈추지 않았다. 좋은 끝마무리를 위해 구정물에 같이 발 담구기우회방법을 썼다. 즉 정음청(正音廳)을 만들고,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훈민정음 보완작업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1445년 신숙주(申叔舟)는 중국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 1447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했고, 1449년 정인지 등은 훈민정음해례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글을 창조하신 세종대왕이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한겨레 한맘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길 환한 길로 달려 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나라에.”라는 한글날 노래가사와 같다. 세종대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준 시대적 사명은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겨레 한맘으로 뭉쳐 희망찬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만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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