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제

도깨비 징검다리 해랑교

비슬신문 2016. 1. 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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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징검다리 해랑교

 

다사읍 박곡리와 방천리를 잇는 금호강에는 옛날부터 돌로 놓은 징검다리가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동네 사람들은 이 다리를 도깨비 징검다리라고 불렀다. 지금 이곳에는 현대식 공법의 콘크리트 다리가 놓였으며 해랑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다리는 도깨비들이 사흘 밤 동안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 사흘 밤 사이 돌을 움직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고 한다. 이 다리는 도깨비가 놓아서 그런지 아무리 심한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았다고도 한다.

도깨비 징검다리는 옛날 영남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 많은 선비가 왕래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대구의 큰 시장을 오갈 때마다 지나다니며 고마움을 느끼고 살았다. 이 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부산에서 낙동강 상류까지 배가 왕래하던 시절, 많은 배가 물건을 싣고 이곳에 도착해 쉬어가곤 했다. 지금도 이곳은 여진이라고 불리운다. 나루터가 생겨나니 자연 사람들도 많이 모이게 되고 장터도 형성됐다.

어느 날 부산에서 오는 소금 배가 여진에 당도하게 됐다. 그 배에서 한 여인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 여인의 옷매무새는 초라하고 세찬 풍상에 시달려 보였으나 얼굴은 남들에게 빠지지 않았다. 그 여인은 남편을 잃고 무남독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의지할 곳 없이 해마다 마침내 여진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인은 여진나루에 주막을 차리게 됐고,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을 해랑 어미라고 불렀다. 그녀의 어린 딸 이름이 해랑이었기 때문이다. 해랑 어미는 장사에도 열심이었고, 동네에서도 인심을 얻게 됐다.


젊은 나이에 외롭게 지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동네 홀아비들의 청혼도 거절하고 오로지 돈벌이와 해랑이를 키우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해랑이는 점점 예뻐지고 마음씨도 착하게 커 갔다. 해랑 모녀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10년이 돼 갔다.


해랑 어미는 돈을 벌어 강 건너에 수마지기의 땅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딸 해랑을 혼인시켜 데릴사위를 얻었다. 사위까지 본 해랑 어미는 농사짓는 데만 전념을 했다. 하루는 연장을 들고 강을 건너가다가 건넛마을에 사는 어떤 홀아비를 보게 됐다. 그러자 문득 자기의 신세에 대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 이후로 논에 갈 때마다 서로 마주치게 되고 둘은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때부터 해랑 어미의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둘은 남의 눈을 피해 주로 밤에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해랑과 그의 남편은 어머니의 밤 외출이 잦아지자 걱정이 됐다. 어느 날 어머니의 뒤를 밟아 결국 모든 연유를 알게 됐다. 해랑과 남편은 의논 끝에 그냥 모른 척 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매일 밤, 그것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강을 건너다니는 어머니가 걱정되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해랑과 남편은 동네 사람들 몰래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건너가고 난 후 몰래 강가에 가서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돌을 들어다 놓고 쌓았다. 그런 노력으로 며칠 만에 훌륭한 징검다리가 완공됐고, 아무것도 모르는 해랑 어미는 매일 그 징검다리를 밟고 쉽게 오가면서 홀아비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해랑 어미와 홀아비는 자식들의 축복 속에 재혼을 하게 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됐다. 동네 사람들은 며칠 밤사이 완공된 이 징검다리를 누가 쌓았는지 몰라 도깨비 징검다리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중에 가서야 해랑 부부가 어머니를 위해 놓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네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효행다리라고도 불렀다.

 

출처 100년달성 스토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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