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출렁이는 대암(臺巖)

구지산 부곡을 따라가면 낙동강 강변에는 내리산성을 끼고 이노정(二老亭)이 자리한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노정의 이노는 이 두 분(노인)을 가리키나 경치가 빼어나서 ‘제일강산’이라고도 하여 이노정 건물 정면에 그 현판을 걸어 놓았다.
이노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인데, 중앙 측면 2칸에는 대청을 두고 양측으로는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나 사방을 돌아가면 마루 난간을 둔 특이한 건물 구조를 보인다.
구지산은 지금의 대니산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 산을 중심으로 구지산부곡 및 구지산면(仇知山面)이라 하다가 지금은 구지면(求智面)이다. 그런데도 한자 표기에서는 仇知가 아닌 求智로 쓰고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강압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왜곡된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구지산 부곡을 따라 낙동강을 더 내려가면 그 유명한 대암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현풍현(新證)조에 ‘臺巖在縣西二十五里-대암은 현에서 서쪽 25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여지도서』의 현풍현 산천조에서도 ‘臺巖在縣西二十五里大江邊有巖平地江心上可坐百餘人李長坤遊賞後爲郭之雲所尋-대암은 현에서 서쪽 25리에 있다. 강변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강 중심에 평지를 이루어 그 위에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이장곤이 유상하고 그 후에 곽지운이 이곳을 찾은 곳이다’라고 기록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하면 『여지도서』 기록이 더 상세하다.
대암을 실제로 보면 산에서 뻗어 내려온 암반이 낙동강 안으로 불쑥 들어간 상태이다. 강변에 집채 높이를 능가하는 자리에서 평지를 이룬다. 이런 가운데 돌아가면서 강물이 부딪히고 흘러 암벽은 수직을 이루는 하식 단애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강 중심에 평지를 이루었다’고 기록하면서 크다는 의미의 큰 대(大)보다는 넓고 평평한 곳을 지칭하는 돈대(臺)로 명칭을 붙였을 것이다.
『현풍현읍지』 산천조에는 대암진(臺巖津)을 기록했다. ‘대암진은 현에서 서쪽 이십리에 있다’고 했다. 구지면에서 의령군으로 통하는 국도 67호선을 낀 구지면 일원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국가산단남로로 바뀌었지만 도로변 대암1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강변에 가옥과 재실로 보이는 건물이 각 한 채씩 보인다. 이곳이 곧 대암 나루 마을이다. 낙동강 건너 고령군 우곡면 포리를 오갔다. 지금의 가옥은 뱃머리를 돌리며 낙동강을 주름잡던 사공의 집이었으리라.
나루터 흔적이라곤 고작 갈대밭 사이 길이 그 옛날 나루터를 따라가는 통로임을 말해주고 있다. 건너편 포리의 나루터 역시 4대강 사업으로 모든 시설은 철거되고, 그늘 드리우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수변 시설에 의존해 버티면서 그 흔적을 말해주듯 바람에 흔들린다. 강섶에서 금빛 반짝이던 그 옛날 모래벌판은 하류의 합천·창녕보를 건설해 물이 충만되어서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은빛 수면은 강물이 흐르는 듯 아니 흐르는 듯 요동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할 따름이다. 정감이 넘치다가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반짝이는 윤슬이 이채롭다.
이장곤이 유상하고 곽지운이 찾던 대암에는 언제부턴가 농업용수 취수장을 세웠다. 굵직한 관로가 수직 단애를 이루는 벼랑을 타고 올라 현재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문헌의 산천조에서 남긴 풍치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구지면 일대는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합리들과 성아들을 비롯한 인근 들판에도 자동차부품연구원과 공장이 들어서서 취수장 설치 당시와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게다가 대암에서부터 내리산성과 이노정 사이에는 왜가리가 목을 빼 올리듯 새로운 취수장이 낙동강 깊숙이서 우뚝 서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취수를 요하는 들판이 그만큼 줄어든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취수장이 설치된 대암은 원래대로 돌려주고 대암정(大巖亭)이라도 세우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하루는 대(臺) 바위(巖)에서 낙동강을 따라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까지 걸었다. 대암리 일대 몇몇 암석 벼랑에는 희귀종으로 알려진 모감주나무가 자생하고 능선부에는 마침 개화를 맞은 가침박달나무도 보게 됐다.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에선 낙동강 하식애와 무심사를 오르는 석회암 바위 틈에서 자생하는 기린초와 돌나물을 비롯해 양치식물인 거미고사리와 석위까지 빼곡하게 자라는 등 식물군을 이루고 있어서 생태계를 주름잡는 듯한 모습을 맛보기도 했다.
『「보각국사비명」따라 일연一然의 생애를 걷다』 저자·시인 권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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