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권영시 칼럼 ;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과 구지면(求智面)

비슬신문 2024. 9. 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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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과 구지면(求智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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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은 중국에서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에서 찾을 수 있다. 무이산은 36개의 봉우리와 37개의 암석이 있다. 그게 적잖은 거리에 걸쳐 있어서 무이산을 거쳐 흐르는 하천이 무이천이 된다. 거기 부곡에서 아홉 굽이를 무이구곡이라 정하였다. 지금 중국의 무이구곡은 행정구역으로는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시(武夷山市)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자연풍경지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이산 부곡은 제1곡 승진동(升眞洞), 제2곡 옥녀봉(玉女峯), 제3곡 선조대(仙釣臺), 제4곡 금계동(金鷄洞), 제5곡 무이정사(武夷精舍), 제6곡 선장봉(仙掌峯), 제7곡 석당사(石唐寺), 제8곡 고루암(鼔樓巖), 제9곡 신촌시(新村市)가 있다. 

거리는 약 9.5km로 양쪽으로 솟은 높은 봉우리 사이로 시내가 흘러서 관광객이 대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유람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옛날에는 제1곡에서 배를 타고 제9곡까지 거슬러 올랐다. 하지만 현재는 제9곡에서 뗏목을 타고 물살을 따라서 제1곡에 이른다. 소요시간이 2시간 정도 걸리는 구곡문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나라에도 고문헌에 기록된 부곡은 부군현의 향·소·부곡과 함께 최하위 행정계층에 해당한다. 중국의 무이산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곳을 각 고을마다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선정하여 부곡으로 기록한 것과는 다소 배치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고문헌에서 빼놓지 않고 기록한 각 부군현의 부곡은 중국의 무이산 무이구곡이 곧 그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옛 중국의 무이구곡은 대나무 뗏목을 타고 풍류를 즐기던 유람이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산천의 풍치가 더할 나위없는 언저리에 정자를 짓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여가를 즐기는 풍류였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강을 타고 오르는 유동(流動)의 풍류였다면, 우리 조상들은 낙향하여 정각을 짓고 은거하거나 시문을 읊었던 만큼 정착(亭着)의 풍류라고 하겠다. 부곡으로 명시하지 않은 곳이라도 부곡문화가 흘렀다. 

필자는 부곡을 연구하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전국의 부곡을 발췌 조사했다. 경기도가 37개 부군현 가운데 7개 부군현에 18개 부곡을, 충청도가 54개 부군현 가운데 28개 부군현에 68개 부곡을, 경상도가 67개 부군현 가운데 50개 부군현에 196개 부곡을, 전라도가 57개 부군현 가운데 23개 부군현에서 56개 부곡을, 황해도는 24개 부군현에 부곡이 하나도 없었다. 강원도는 26개 부군현 가운데 6개 부군현에서 10개 부곡을, 함경도 22개 부군현 역시 황해도처럼 전무했다. 평안도는 42개 부군현 가운데 3개 부군현에서 3개 부곡이 기록됐다.

이처럼 전국에 329개 부군현에서 117개 부군현에 부곡은 351개나 된다. 이런 가운데 대구호부부의 부곡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방면 조에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를 기록하면서 풍각 고현에 있다고 명기하였다. 풍각 고현은 행정 관할이 바뀐 지금은 청도군 풍각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현풍현 건치연혁 조에서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은 원래 밀성군 소속이었으나 공양왕 때 현풍으로 소속시켰다고 기록되었고, 성씨 조에 구지산(仇知山) 변(卞)씨가 본 현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방면 조에서도 구지산(仇知山)은 본래 부곡인데 남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30리라고 방향과 거리를 기록하였다.

이렇듯 구지산은 지금의 대니산이고, 이 산을 중심으로 낙동강을 끼고 구지산면 또는 구지산부곡이 위치하였다. 지금의 구지면의 전신은 구지산면이자 구지산부곡이 된다. 그럼에도 한자 표기는 仇知山部曲에서 유래한 仇知面이 아니라 求智面으로 쓰고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지명과 역사는 본래의 것으로 되찾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당진시 면천면은 조선 시대에는 면천현이었다. 거기에 읍성과 관아를 일제가 허물고 관아 자리에는 교육을 빌미로 영구적인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웠다. 당진시에서는 일찍이 면천읍성을 복원했다. 뒤이어 면천초등학교도 다른 데로 옮기고 그 자리에 다시 면천현 관아를 원래처럼 복원했다. 그간 학교 건물이 장애가 되어 어렵게 버텨내던 나이 1100살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이제야 활기를 되찾았다. 역사 인식과 복원 의지가 얼마나 강했으면 초등학교를 이전할 정도였을까, 엄청난 관심사다. 전국적으로 따를만한 본보기가 된다.

『「보각국사비명」따라 일연一然의 생애를 걷다』저자·시인 권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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