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의 변명
‘어머 야~’ 화단에 사과를 따던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른다. 뭔가 싶어 달려가 보니 왕거미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려든 잠자리를 반쯤 삼키고 있다. 겨울을 채비하는 녀석의 식탁을 빗자루로 걷어냈다.
익은 석류를 수확하려다 낭패를 당했다. 가지 사이로 손을 뻗는 순간 얼굴에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밤새 석류나무와 담장 사이에 올망졸망 쳐놓은 덫에 보기 좋게 당했다. 일그러진 표정에서 살기를 감지한 걸까. 녀석은 이미 몸을 숨긴 뒤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처 놓은 덫에는 먹다 남긴 곤충의 사체가 힘겹게 걸려있다. 지금쯤 배를 불린 녀석은 안방에서 느긋하게 잠을 자거나 싱싱하고 육질이 좋은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잠복할 것이다.
녀석은 장비도 갖추지 않고 나뭇가지 꼭대기를 올라 번지점프를 감행하는 스턴트맨이다. 주로 가느다란 외줄을 타고 공중에 섬세하고 정교한 덫을 설치한다. 흠잡을 때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어느 면으로 보나 노련미를 갖춘 당대의 최고 건축가이다. 그뿐만 아니다. 하늘을 나는 수많은 곤충을 자유자재로 낚는 기술이다. 강태공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하다. 땅바닥에서는 뒤뚱거리지만, 공중에서는 물 찬 제비와 다름없다. 잎사귀 하나면 금세 완벽한 참호를 만들어 몸을 숨긴다. 완벽한 위장으로 상대를 속이거나 허점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희대의 포식자다.
거미 한 쌍이 담장과 석류나무 사이에 터를 잡아 그물을 설치한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려 놓았는데 덫을 복원하고 있다. 먹이를 포획하기에 용이한 장소인 것 같다. 꽁무니에서 긴 은실 하나를 뽑아 사방에 튼튼한 기둥을 세운다. 투명한 실을 한 올씩 풀어 그 위를 빙글빙글 돌자 보기 좋은 그물이 된다. 수학자도 어렵다는 미분과 적분에다 3차원의 수학까지 응용한 건지 허공에다 같은 형태의 건물을 짓는다. 흔들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 고난도의 기술이 가미되었나 싶다. 탄탄한 설계를 바탕으로 완벽한 시공이 돋보인다.
녀석의 몸집보다 몇 배나 큰 나방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다. 식탐이 워낙 포악한지라 나방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보지만, 그물만 출렁일 뿐 끊어지지 않는다. 덫을 설치할 때 큰 먹이의 하중까지 충분히 계산에 넣어 시공한 모양이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를 보면서 부실시공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이 없다 했는데 건축에 관한 한 거미도 위대한 스승임이 틀림없다.
세상이 고요에 빠진 듯 조용한 시간, 거미줄에 걸린 은은한 달빛만을 밤을 밝힌다. 검은 물체 하나가 조심스럽게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다. 외줄에 의지한 채 사방을 살핀다. 녀석은 주전부리가 심하거나 출출할 때 이슬로 빚은 소주에 싱싱한 안주를 떠올린 모양이다. 걸려든 먹잇감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참호로 발길을 옮긴다. 잠복시간이 길어도 결코 조바심을 내는 법이 없다. 얼빠진 녀석이 걸려들 때까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기만 한다. 날벌레 몇 마리쯤 걸려들기라도 할 텐데 오늘따라 허탕이다. 포획할 도구가 완벽하다고 마냥 사냥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녀석의 세계에도 인간처럼 운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다.
녀석은 표호 하는 수사자처럼 위엄도 없고 북극곰 같은 듬직한 앞발도 없다. 하이에나의 날카로운 이빨도 치명상을 입히는 살모사의 독니도 없다. 지독하게 못생긴 녀석은 상대가 주눅이 들게 할 강렬한 눈빛도 없다. 다리에는 지저분한 털이 숭숭하고 머리인지 가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괴상한 몰골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자신보다 한 차원 높은, 그것도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곤충의 목숨만을 노리는 카이저소제다. 먹잇감이 걸려들기만 하면 바로 숨통을 끊는 불한당이다.
거미가 만찬을 즐기는 저녁 시간을 택해 일망타진하기로 작전을 편다. 농약이 분사되자 거미집은 일순간에 벌집 쑤셔놓은 듯 혼돈에 빠진다. 왕거미가 재빨리 고공낙하를 펼치며 위험 반경을 벗어나고 있다. 어린 것은 정신을 잃고 거미집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포식자의 소굴이 일순간에 폐허가 된다.
도망치던 왕거미를 잡아 주리를 틀었다. 녀석은 죽음을 감지한 듯 내게 일갈한다. “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얼빠진 곤충만을 잡았을 뿐이다. 이웃에 살면서 경고 한 번 없이 대량 살상용 무기로 공격한다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유엔도 금지한 화학물질을 쓰다니 너무 야비하고 야만적이야.” 내가 대답했다. “그래 맞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존 본능 때문이야. 먹느냐 먹히느냐, 사느냐 죽느냐가 딸린 문제 앞에 세상은 늘 똑같을 수만은 없는 거야. 반칙도 있어. 근데 넌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야. 내 영역에 침범해 함부로 노략질을 일삼았잖아. 형편없는 왜놈같이 말이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사용료 한 푼도 내지 않은 주제에. 그렇다고 수인사라도 한 번 한 적이 있나. 여기저기 덫을 놓아 포획한 질 좋은 고기로 포식을 하고도 입을 쓱 닦았잖니. 난, 어떤 경우라도 손해 보고는 못살아. 징그럽게 생긴 네 모습 때문에 아내가 기절할 뻔했잖아. 집 안 곳곳을 온통 더럽혀 놓고도 청소 한번 해 준 적 없잖아.”
“내 정체가 뭐냐고. 내 호(號)는 너와 같은 포식자이고 별명은 황당한 인간이야.”
*카이저소제 :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나오는 살인마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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