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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

비슬신문 2020. 7. 3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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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는 대구·경북 선비 23인이 1601321일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伊川里) 선사(仙査)에서 뱃놀이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금호(琴湖)는 조선 시대의 하빈현(河濱縣)의 별칭(別稱)으로 현재 다사읍·하빈면 지역을 말한다. 선사는 현재 다사읍 이천리 이강서원(伊江書院)이 위치한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다. 선유도(船遊圖)는 뱃놀이를 하는 것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선사의 지명은 선사사(仙楂寺)에서 유래되었다. 선사사는 신라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857~?)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세연지(洗硯池무릉교(武陵橋난가대(爛柯臺) 등이 있었다. 선사의 유래는 고운 선생과 관련이 있다. 고운(孤雲) 선생을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를 회통한 인물로 유선(儒仙)이라고도 한다. 선사(仙楂)를 풀이하면, 신선()이 뗏목()을 따고 신선놀음을 하였기에 선사라 부른다. 신선은 유선이라 칭하는 고운 선생을 말한다. 그리고 사()와 사()는 동의어로 쓰인다.

 

뱃놀이를 한 배경에는 선산(善山)에서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선생이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선생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선사에 서낙재가 기거하게 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이다. 이전에는 임하 정사철(林下 鄭思哲) 선생이 머물렀다. 정임하와 서낙재는 대구 출신으로 영남지역에서 큰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선유도(船遊圖)의 우측 세로에 황명만력이십구년신축모춘지념삼일달성금호선유록(皇名萬曆二十九年辛丑暮春之念三日達成琴湖船遊錄)”이라 적혀 있다. ‘황명만력이십구년신축(皇名萬曆二十九年辛丑)’은 명나라 신종(神宗) 29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 선조(宣祖) 34(1601)에 해당된다. ‘모춘지념삼일(暮春之念三日)’323일이다. ‘달성금호선유록(達城琴湖船遊錄)’대구(大邱) 다사(多斯)에서 뱃놀이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다음 줄에는 송나라 주자(朱子)의 무이(武夷) 어정시(漁艇詩)가 적혀 있고, 다음으로 연장자순으로 선사선유에 참석자 23인의 명단과 시()가 적혀 있다. 참석자 23인은 배 위에서 주자의 어정시 20자를 운자로 정하고 각각 운자를 나누어 가지고 시를 지었다. 선유도 서문(序文)에 의하면 한 사람만이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선유도에는 8개의 시가 빠져있다. 이는 추후에 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7개가 빠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다음으로는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다사읍 이천리 일대를 묘사한 것으로 중앙에는 당시 존재했던 신라고찰 선사사(仙楂寺)가 위치하고 있다. 선사사를 안은 산은 마천산(馬川山)이며, 우측으로 이천(伊川)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옛길에는 나귀를 탄 선비가 그려져 있고, 금호강에는 그날 뱃놀이를 한 배가 부강정(浮江亭)을 향하여 내려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사 난가대(爛柯臺)가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난가대는 도로가 건설되어서 그날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그림의 하단에는 감호 여대로(鑑湖 呂大老)가 쓴 서문이 있다. 서문에는 뱃놀이를 주관한 서낙재(徐樂齋)의 신변과 뱃놀이를 하게 된 배경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부강정의 주인 진사(進士) 윤대승(尹大承) 선생과 하목정의 주인 진사 이종문(李宗文) 선생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나온다.

 

금호선사선유를 요약하면, 1601년 음력 323일 가랑비 내리고 개인 봄날에 신라고찰 선사사(仙楂寺) 앞 금호강에 서낙재(徐樂齋), 장여헌(張旅軒), 여감호(呂鑑湖), 23인은 배에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술통을 싣고 아름다운 금호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12일의 일정에서 참석자 23명 중에 20명은 부강정(浮江亭)에서 투숙하고, 3명은 이진사(李進士) 집에서 잤다.

 

다사향토연구소 소장 최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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