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 출신의 한림학사, 고려로 귀화해 문화시중이 되다!
포산군 암곡 곽경선생을 모신 암곡서원에 가다
대구에 몇 개의 서원이 남아있을까?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서 현황을 조사한 결과 24개의 서원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절반인 12개가 달성에 있다. 서원은 교육과 배향한 분을 추모하는 제향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니 달성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 교육의 고장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본사에서는 지난해부터 본 지면을 통해 달성군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서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지면에서는 암곡서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원은 중부내륙지선과 현풍읍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니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1959년 포산사 사당으로 건립되었으며, 2009년 사당 바로 위에 건물을 새로 짓고 사당 또한 새로 지어 옮겨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서원은 방형의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문인 숙연문(肅然門)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인 정일당(精一堂)이 나타난다. 강당은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한 개씩의 방이 있다. 동쪽 방은 석척당(夕惕堂)이다. 일건석척(日乾夕惕)의 줄임말로 밤낮으로 힘쓰고 두려워하라는 의미이고, 서쪽 방은 종일토록 공부하고 힘쓰라는 의미의 일건당(日乾堂)이다.
강당 좌우로 동재인 의인재(依仁齋), 서재인 경의재(敬義齋)가 있고, 강당 뒤의 사당인 포산사에는 현풍 곽씨 일명 포산 곽씨의 시조인 포산군 正毅公(정의공) 곽경(郭鏡)을 비롯하여 이부상서를 제수받은 정간공(靖簡公) 곽기정, 병부상서 곽한정, 금오위교위공 곽자의, 목사공 곽순종 등 5위를 배향하고 있다.
암곡서원으로 이름한 것은 시조인 정의공 곽경 선생의 호를 따서 명명했다.
선생(1117~1179)은 중국 송나라 출신으로 조정에서 한림학사를 지냈는데 시대의 어려움을 만나 고려에 귀화하여 인종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포산군으로 봉해졌다. 조선 시대에 포산현이 현풍으로 개칭되면서 현풍이 본관이 되었다.
문장과 덕행의 기록을 말에 실으면 땀이 날 정도이고 집에 보관하면 천장까지 자료가 가득 찼는데 연대가 오래되고 전쟁이 빈번하여 문헌이 많이 유실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팔경대(八景臺)를 두고 지은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소개하면
다하고 물 깊은 곳에 절이 있으니 (寺在山窮水盡處 사재산궁수진처)
백구와 황학이 함께 맴도네 (白鷗黃鶴共徘徊 백구황학공배회)
성난 파도가 문에 닿아 갠 날에도 우레소리 장엄하니
(鯨波接戶晴雷壯 경파접호청뇌장)
모래 언덕 난간에 이으니 눈처럼 쌓였네(沙岸連軒晩雪堆 사안연헌만설퇴)
- 대동강-
바람 속에 거문고 줄 같은 수양버들 맑은 퉁소소리 내고
(風裏緣琴淸籟發 풍리연금청뢰발)
비에 젖은 붉은 비단은 해당화 펴서라네(雨中紅錦海棠開 우중홍금해당개)
아랑사에 뜻 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阿郞有意同今古 아랑유의동금고)
구경하는 나그네는 노니느라 돌아올 줄 모르네(探勝遊人趁未回 탐승유인진미회)
- 능라도-
시내 있고 돌 없으면 시내 또한 들판이고(有溪無石溪還野 유계무석계환야)
돌 있고 물 없다면 돌은 기이함이 사라진다네 (有石無溪石不奇 유석무계석불기)
이곳은 시내 있고 기암괴석 함께 있으니(此地有溪兼有石 차지유계겸유석)
하늘이 명승지를 열어 내게 시를 짓게 하네(天開勝地我爲詩 천개승지아위시)
- 을밀대 -
높은 누대 올라 굽어보니 마치 허공에 뜬 듯 (高臺臨眺若憑虛 고대임조약빙허)
고기 잡는 삶은 나만 못하리 (漁釣生涯我不如 어조생애아불여)
뜰 앞에 꽃 떨어져 봄은 늦어 가는데 (花落庭前春思晩 화락정전춘사만)
주렴에 솔 그림자조차 더욱 쓸쓸하구나 (碧簾松影更簫疎 벽렴송영경소소)
- 청류벽 -
5세손 곽기정(郭基正) 선생은 전리의랑(典理議郞)에 제수되었고 포산백에 봉해졌다.
선생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 경기도, 전라도, 평안도 지역으로 세거지를 확대해 나갔으며, 선생의 동생인 곽한정 선생의 후손들은 관향지인 현풍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 세거지를 넓혀나감으로써 현풍곽씨는 기호계와 영남계통으로 나뉘게 되었다.
『현풍곽씨세보』에 의하면 현풍곽씨는 선산, 해미, 강릉, 봉산 등의 별관을 사용하였으나 족보 첫머리에 모두 시조를 곽경으로 하여 현풍곽씨 후손이라고 한다.
포산곽씨 사공(四公) 사적비를 통해 곽기정 선생을 소개한 일부를 보면
의기가 양양하고 자질과 성품이 순후하여 부형에게 효우(孝友)하여 소문과 명망이 드러나니 향리에서 공을 나라에 천거하여 전리의랑과 이부상서를 제수받았다. 포산백을 봉하니 한 치의 사심도 없고 매양 현민들의 안일을 염려하였다. 빼어나고 넓은 산수를 닮아 마음 씀씀이도 넓어 한 점의 재산도 축적하지 않고 임무를 마쳤고 정간이란 시호를 받았다.
곽한정(郭漢正) 선생에 대한 자료는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포산곽씨 사공 사적비 중에 언급된 것을 소개하면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았다. 품행이 바르고 행동으로 옮기니 중인들이 공을 청렴하고 바른 선비라 칭하였다. 병부상서가 되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니 포산군으로 봉했다. 또한 중도를 지켜 향민들을 교화시키자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곽자의(郭子義) 선생은 곽한정 선생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꿋꿋한 뜻이 있어 남을 속이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동료가 부정한 일을 행하면 그러지 말라고 달랬는데 이를 들은 사람은 모두 순종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이 조정에 알려져 금오위교위로 임명되었다. 임무를 받아 현지에서의 직분에 소홀함이 없도록 충실했다. 왕이 행차하면 공이 먼저 인도하여 비상을 막으니 위국의 시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당에 모셔진 이가 목사공 곽순종(郭順宗) 선생이다. 선생에 대한 내용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안주목사(行安州牧使) 훈련원정(訓鍊院正) 포산 곽공 묘비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휘는 순종, 자는 이원(而源)으로 단종 갑술에 정시무과에 올랐다. 세조 때, 웅천현감, 개천군수, 안악군수, 벽동군수, 안주목사, 훈련원정을 역임하였다.
선생이 당상의 지위에 올랐을 때 북방의 여진이 강성하여 우리 땅을 번번이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태종과 세종의 양 임금시대에 육진과 사군을 설치하였다. 세종 때 적들이 매복한 쇠노의 활에 우측 팔을 맞았을 때 임금이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겨 국의(國醫)를 보내 치료케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무슨 연유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성종 13년에‘안악군수 곽순종을 파면하다’, 중종 13년에 ‘간원에서 박인, 김철문, 곽순종이 당상으로 오를 계제가 아니니 체직하기를 아뢰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현풍향교에서 전교를 역임한 암곡서원 관리위원장인 곽호탁(81. 현풍읍 지리)위원장은 “향사는 유림향사로 다른 서원과 달리 음력 2월 초정일(初丁日)에 지내는데 전일 입제 한다. 숙연문 옆의 쪽문인 세심문(洗心門)이 전망을 가릴 정도로 높은 것은 향사 때 희생물을 리어카에 싣고 오기 위해서였는데 요즘이면 이렇게 크게 문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이 깨끗한 편이다. 하지만 건물은 사람이 살아야 그 훈기로 관리가 되는데 우리 서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서원 관리가 어렵던 차에 곽영록 유사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큰 힘을 보태고 있다”고 했다.
곽영록 유사는 “ 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5년 되었다. 집이 서원 바로 앞이고 후손으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많지 않지만 몇 사람에게라도 서원을 소개할 수 있어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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