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접무연지실’인 개실마을에 가면
‘문충세가(文忠世家)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입추가 지나고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다.
절기상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건만 기고만장한 여름의 열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볕이 따갑다. 꽃피고, 나비 날고, 새가 우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을 그리며 길을 나섰다. 개실마을로.
개실마을은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마을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택이 있다.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점필재선생의 6세 손인 수휘공이 쌍림면 하거리로 장가든 후 자자손손 살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개실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고을의 생김새와 구조가 마치 나비가 춤을 추는 듯한 형세로 화개접무연지실(花開蝶舞然支實) 즉, 꽃 피고 나비가 날아 자연스레 열매가 열리니 좋은 곳이라고 1650년에 터 잡아 지금껏 370여 년 동안 후손들이 살고 있다.
뒤에는 화개산, 앞에는 소하천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특이하게도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지 않고 개천 건너 바로 앞에 큰 산이 뻗어 있어 답답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에 앞산과 좌청룡 사이의 트인 공간까지 막아주는 산이 있어 아늑함을 줄 뿐만 아니라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앞산을 문필봉이라고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문필봉이라고 부른 적이 없고 나비가 춤추는 모양이라고 하여 접무봉(蝶舞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나비가 춤추며 꽃을 찾아 날아오는 ‘花心’의 자리는 어디일까. 바로 종택의 사랑채 한가운데가 그 자리란다.
점필재 문충공의 후손이 대대로 사는 ‘文忠世家’ 종택은 선생의 9세 손이 1800(정조24)년에 건립하였다. 일반적으로 종가의 건물은 口형이지만 문충세가는 파종손이라 트였다. 종손은 장남으로 이어지는데 파종손은 장남이 아니라 다섯째 아들에서 후손이 뻗어 오늘까지 대를 이온 종손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집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고 한다. 집 구조가 口형인데 그 안에 나무를 심으면 口+木 =困이 되어 어려움이 생긴다는 설에 의해서라고 한다. 현재 종택에는 선생의 19세 손이 살고 있다.
종택과 이웃한 곳에 학문을 기리기 위해 1866년에 지은 도연재(道淵齋)가 있다.
이 건물은 앞산의 접무봉과 정면을 피하려고 우측으로 살짝 튼 게 특징이다. 대청마루 우측에 누마루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세거지의 광거당 누마루처럼 그리 넓지 않고 두 사람이 앉아 바둑두면 좋을 만큼의 공간이다. 그 누마루는 다락방에 올라가듯 목계(木階)를 딛고 올라가야 한다. 목계(木階)의 크기가 어른 주먹만 한 것이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도연재는 석채례(釋菜禮)를 지냈다. 진설품으로는 미나리, 부추, 대추, 밤으로 다른 곳의 석채례에 비해 간단했는데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개실마을은 도시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과 전통 엿 만들기, 떡메치기, 압화 만들기, 칼국수 만들기, 유가 만들기, 대나무 물총 만들기 등을 통해 농촌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들에게 소득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선비체험을 통해 전통문화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이용호 고령문화관광해설사는 “개실마을에 점필재 선생의 종택이 있지만 사실, 개실마을과 선생과는 무관하다. 아버지 김숙자 선생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곳에서 형인 종석과 소학을 배운 것이 전부일 뿐이다.
선생은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하고 부인은 전라도 운봉현 관비로 갔다. 13세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역모가 아니라서 아들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의 6세 손이 쌍림면 하거리로 장가들면서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해설사의 입김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대신할까 한다.
선생은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숙자(叔滋)로부터 소학을 배웠다. 길재 선생의 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점필재 선생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로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고 부르지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 한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일손이 사관이었던 당시 기록하였던 사초에 스승 김종직선생이 단종을 애도하며 지은 〈조의제문〉을 실었다. 〈조의제문〉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楚)나라 의제의 죽음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종을 의제, 세조를 항우에 비유한 것으로, 김종직은 이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그를 비난하였는데 그 일로 인해 일어난 첫 번째 사화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류에 풍자적이었다는 이유로 낙방 되는데 그 시를 보면
雪裏寒梅雨後山(설리한매우후산)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看時容易畵時難(간시용이화시난) 바라보기는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네
早知不入時人眼(조지불입시인안) 일찍이 시인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으니
寧把曣脂寫牧丹(영파연지사목단)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조선 최대의 폭군이었던 시대에도 점필재 선생은 〈소학〉과 사서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길렀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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